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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희극 다운 희극공연이 존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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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코미디인가?

글 : 정진수(연출가, 성균관대 교수)


아놀드 아론슨은
'미국의 아방가르드 연극 - 그 역사(American Avan - garde Theatre : An History)' 란 책의 서문에서 이 시대 연극을 세 종류로 분류하고 있다. 첫째가 대중연극(popular theatre)이고 둘째가 부르주아 연극(bourgeois theatre)이며 셋째가 엘리트 연극(elitist theatre)이다 대중연극은 오늘날 TV드라마나 영화가 그 자리를 대신해 주고 있으며 부르주아 연극은 뉴욕의 브로드웨이나 런던의 웨스트엔드에서 볼 수 있는 상업연극(뮤지컬이 주류를 이루는)에서 주로 볼 수 있으며 엘리트 연극은 소위 전위 연극(avant - garde theatre)을 가리킨다.

이 같은 분류를 우리나라로 가져왔을 때 어떻게 적용 될 수 있을까?
대중연극의 경우는 영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TV와 영화가 그 자리를 메워 줄 것이며 연극으로는 아마도 뒷골목의 개그 콘서트 류나 그에 버금가는 저급한 연극들을 포함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부르주아 연극, 또는 주류연극(mainstream theatre)과 엘리트 연극은 존재하는가? 최근에 뮤지컬이 붐을 이루면서 LG아트센터나 예술의 전당 오페라 극장,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등에서 장기 공연들이 이루어 지고 있는데 이는 분명 부르주아 연극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 나머지 대학로를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는 대다수 연극들은 과연 부르주아 연극으로 분류 될 수 있을까? 아니면 우리의 경우는 부르주아 연극과 엘리트 연극이 뒤범벅이 되어 얼치기 연극으로 혼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연극의 현상에 대한 이런 의문들로부터 출발하여
우리 연극의 바람직한 궤도를 모색하면서 떠오른 것이 연극의 장르 가운데 희극, 곧 코미디(comedy)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한 나라의 연극 문화는 어떤 다른 문화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겠으나 그 사회의 안정된 중류 이상의 계층을 주 고객으로 삼는 주류 문화 내지 부르주아 문화가 굳건히 존재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나서 시대를 앞서가는 유토피아적 비전을 제시하는 엘리트 문화가 뒤를 이을 때 건강한 문화가 꽃피운다고 보고 싶다.
그런데 앞에서 이미 의문을 제기 했듯이 우리의 경우는 부르주아 연극과 엘리트 연극이 분명한 경계를 짓지 못한 가운데 두리뭉실하게 뒤섞여 있다고 보인다.
이는 우리의 연극이 워낙 기반이 취약한 가운데 분명한 타겟을 설정하지 못하고 부르주아 연극이 엘리트 연극 흉내를 내고 엘리트 연극이 부르주아로 신분상승(?)을 꾀하기도 하는 등 방향성을 정립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 특이한 현상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어쩌면 아래에 살펴 볼 영미 연극의 경우처럼 이제 부르주아 연극과 엘리트 연극의 경계는 진작 허물어졌는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 보다 연극예술의 선진국인 영국과 미국의 경우를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영국의 경우를 보자면 우선 부르주아 연극의 온상인 웨스트 엔드에 상업극장들이 모두 43 개이며 소위 변두리라고 알려진 프린지에만도 37 개의 극장이 있다. 그런데 프린지의 극장이라고 해서 대학로의 소극장만을 연상해서는 안된다. 거기에는 가령 리치몬드 시어터나 햄스테드 시어터 등과 같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녔으며 5 - 6 백석 이상의 객석을 갖춘 유수한 극장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세계 최정상의 극장인 국립극장(3 개 극장)과 바비칸 센터의 2 개 극장, RSC가 운영하는 2 개 극장 그리고 근년에 복원된 글로브 극장과 리젠트 공원의 야외극장은 포함되지 않은 숫자이다. 이들을 다 합치면 런던 시내에 극장만 무려 90 개 정도를 헤아린다.
그러면 이들 극장들에서 어떤 연극들이 공연되고 있는가?
그들 식의 분류를 따르면 뮤지컬, 드라마, 코미디의 셋으로 나뉜다.
여기서 '드라마'라고 하는 것은 뮤지컬도 아니고 코미디도 아닌 것을 다 포함하는 분류이다. 곧 비극과 멜로드라마 그리고 <세일즈맨의 죽음> 같은 진지한 현대극 모두 여기에 속한다. 그렇다면 10 월 말 현재 웨스트 엔드에서 공연되는 연극을 분류하자면 뮤지컬이 23 편, 드라마가 41 편, 코미디가 16 편이다. 프린지에서는 뮤지컬은 없고 드라마가 17 편, 코미디가 9 편에 소위 여흥물(Entertainment)이라고 막연히 분류되는 공연이 9 편이다.
그런데 지금 런던에서 공연되는 코미디란 대개 어떤 것들일까? 영국에서는 코미디라고 할 때 연극무대에서 공연되는 희곡의 한 장르로서의 '코미디' 말고 캬바레나 카페 같은 곳에서 직업 코메디언들이 나와서 관객을 웃기는 여흥의 일종으로서의 소위 보드빌이나 stand up comedy 또한 코미디라고 일컫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여흥이 값싸고 저질스러운 유치한 개그와는 다르다. 제법 품격을 갖춘 여흥으로서 TV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는 무시할 수 없는 장르이다.
그러면 연극무대에서 공연되는 코미디는 어떤 것들일까?
우선 셰익스피어의 코미디가 주종을 이룬다. 지금 현재 공연 중인 작품으로는 <As You Like It>, <Comedy of Errors>, <Twelfth Night>, <A Midsummer Night's Dream> 등이 있다. 그밖에 몰리에르, 버나드 쇼 등의 고전도 포함되어 있으며 죠 오튼, 사이몬 그래이, 알란 베넷 같은 유명 극작가들의 희극들이 리바이벌 되고 있고 미국의 희극 작가 죠지 카우프만의 작품과 대빗 마멧의 신작 희극도 공연되고 있으며 국립극단에서는 고골의 <검찰관>을 각색한  <UN Inspector> 같은 작품도 있고 신작 희극도 몇 편 공연되고 있다. 이렇게 간단히 살펴만 보아도 코미디는 정통 연극의 품격을 갖춘 연극의 장르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미국 쪽의 사정은 어떠한가?
뉴욕에도 소위 부르주아 연극의 온상인 브로드웨이에만 40 개의 극장이 있으며 오프 브로드웨이에는 무려 78 개의 극장이 있다. 물론 이들 극장도 서울 대학로의 소극장들과는 다르다.
이들 가운데는 정규 극장이 다수를 점한다. 다만 브로드웨이의 극장들은 상업성이 런던보다 훨씬 강세를 보인다. 그 증거로 현재 공연 중인 작품들 가운데 뮤지컬이 단연 압도적으로 많아서 전체 공연 47 편 가운데 무려 33 편을 차지하고 드라마는 8 편, 코미디는 6 편에 그친다. 이런 추세는 오프 쪽에도 영향을 미쳐 거기서도 뮤지컬이 31 편이나 차지한다. 그러나 드라마가 더 많아서 47 편애 달하고 코미디는 32 편에 이른다.
그러면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는 코미디는 어떤 것들일까?
미국을 대표하는 희극작가 닐 싸이몬의 작품과 영국의 대표적인 희극작가 알란 애이크번, 알란 베넷의 희극들이 포함되어 있고 신작이 3 편이다. 오프에서는 신작이 압도적으로 많아서 크리스토퍼 듀랑과 어거스트 윌슨의 작품을 포함하여 무려 24 편이 신작이고 리바이벌은 셰익스피어 작품 2 편과 노엘 카워드의 작품 1 편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런던과 뉴욕의 연극무대를 돌아보았을 때 공통적으로 파악되는 것은 코미디의 비중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드라마'의 경우는 고전비극과 멜로드라마와 현대의 진지한 희곡들까지 모두 포함한 넓은 장르임으로 단일 장르만 놓고 보았을 때 뮤지컬을 제외하면 코미디가 단연 상위를 점한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뮤지컬의 경우도 절반 이상이 '뮤지컬 코미디'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영국이나 미국의 관객들은 코미디를 가장 선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영미의 부르주아 연극, 곧 주류연극은 코미디로 대표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아론슨이 분류한 세 번째 연극, 곧 엘리트 연극 다시 말해서 전위 연극은 어디로 갔나?
위에서 런던과 뉴욕에서 현재 공연되고 있는 연극들을 살펴 보았는데 이들 중에서 전위 연극이 포함되는 분류는 '드라마' 인데 드라마로 분류된 연극들 가운데 딱 부러지게 전위 연극으로 파악되는 작품들은 찾기도 힘들거니와 포함되어 있다고 해도 매우 희귀할뿐더러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평단의 주목을 끄는 작품들은 과문인지 모르나 거의 없어 보인다.
결국 아론슨에 의하면 서양의 경우 연극무대에서 이제는 오직 부르주아 연극만 남고 대중연극은 TV, 영화 등에 빼앗겼으며 엘리트 연극, 곧 전위 연극은 1990년 대에 이르러 소멸했다는 것이다.
소멸했다기 보다 부르주아 연극에 흡수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지 모른다.
전위 연극은 이제 더 이상 변방에 머물러 있지 않고 주류연극에 편입되어 그 자체가 제도권의 기성 연극이 되어 버린 것이다. Foreman, Wilson. Wooster Group 등과 포스트모던 댄스, 퍼포먼스 아트 또한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의 여타 공연들과 대등하게 취급될 만큼 이제 전위라는 용어는 퇴색할 대로 퇴색했다.
이제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충격을 주지 못하며 오히려 새롭다는 것이 당연시 되게끔 되었다.
하루가 멀게 달라지는 디지털 기술, 패션과 디자인, 광고 등과 대중 예술의 영향으로 예술 또한 소모품으로 인식되고 트렌디 상품으로 취급되기에 이른 것이다. 새로운 것은 이제 등장하는 순간에 낡은 것이 되어 버리는 시대에서 전위 연극은 이제 '고전적 형식(form of classicism)' 으로 굳어져 버렸으며 전위라는 용어는 1990 년 대에 이르러 소멸되었다는 것이 아론슨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위에서 살펴본 대로 영미의 부르주아 연극 안에는 뮤지컬이 위세를 떨치는 가운데 진지한 극작가들의 작품과 더불어 정통 희극과 어제까지 전위로 불리우던 연극들이 함께 공존함을 알 수 있겠다. 그리고 이 가운데 뮤지컬을 제외하면 고전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희극이란 장르가 만만치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이미 지적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연극무대에서는 희극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허약하다는 것을 숨길 수 없다.
기성 극작가들 가운데 희극만을 쓰는 희극작가는 단 한 명도 찾기 힘들고 어쩌다 희극에 손 대는 작가도 희귀하기 짝이 없다. 이는 우리 연극을 위하여 대단히 불행한 측면이다.
여기에는 희극에 대한 편견이 지배해 왔음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연극은 진지하고 심각한 예술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신극사 초기부터 자리 잡아 왔고 희극은 경박하고 천박한 장르라는 잘못된 인식이 자리잡혀 왔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생각이 연극인은 엘리트이고 연극은 엘리트 예술이라는 선민의식을 낳게 했고 따라서 관객들이 이해하고 공감하고 납득할 수 있는 연극은 가치가 떨어지는 연극이라는 생각마저 심어주게 했다고 본다.
관객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고 공감하기 어려운 연극을 일부러 만들어 보임으로 해서 관객들의 마음속에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왔던 측면이 없지 않다.

그렇게 해서 결과적으로 연극과 연극인들이 관객의 존경심을 사는 데는 성공했는지 모르나 그럼으로 해서 관객을 극장 밖으로 내모는 데에도 성공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옹색할 대로 옹색해진 우리의 부르주아 연극에 멀어진 관객의 발걸음을 되돌리게 할 수 있는 방책이 있다면 그 해답은 희극의 발흥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고 본다.
비록 현재 뮤지컬이 크게 인기를 얻고 있고 더욱 발전하여 창작 뮤지컬의 전성기가 도래한다고 하더라도 그 것은 정통 연극의 희생이라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서는 얻어질 수 없기 때문에 뮤지컬은 결코 해답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왜 희극이 연극 회생의 해답이 될 수 있다는 것인가?
희극은 한마디로 쉽게 말해서 관객을 웃기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연극의 장르이다.
관객을 웃기려면 먼저 관객이 그 연극을 이해하고 납득하고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희극의 성패는 관객을 앞에 놓고 바로 그 자리에서 결판이 난다.
연극을 다 보고 집에 가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 웃는 관객은 없다. 그리고 연극을 보고 난 뒤에 평론가의 해설을 읽고나서야 비로서 웃는 관객도 없다.
희극은 바로 그 자리에서 웃기거나 웃기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이렇게 해서 희극에 맛들인 관객은 희극만을 보러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희극을 만드는 데 참가한 극작가, 연출가, 배우, 디자이너 등이 오로지 희극만을 만드는 데 참여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관객은 그가 좋아하는 연극인이 참여하는 다른 연극에도 자연히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연극인이 뮤지컬에도 참여하는 경우는 결코 흔치 않을 것이다.
또한 희극은 제작비가 싸게 먹힌다.
뮤지컬 한 편을 만드는 제작비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것이며 고작 뮤지컬을 제외한 희극 아닌 다른 장르의 연극을 만드는 데 소요되는 제작비와 맞먹는 정도일 것이다.
우리 연극의 회생을 위한 하나의 방책으로 희극의 발흥을 대안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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