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njung Theatre Company

대중예술의 이해
성균관대학교 공연영상문화연구소 기획 | 정진수 | 정용탁 외|


대중연극, 알고 보기.(첫번째 페이지)
글 / 정진수
 

 1.
 
 대중연극(popular drama 또는 theater)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이해를 가지기에 앞서 연극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알아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만 "대중예술의 이해"라는 큰 제목을 가진 이 책의 한 장에 불과한 제한된 지면에서 연극이란 무엇인가를 충분히 설명할 겨를도 없고 또 연극은 이런 것이다, 하고 못박을 수 있는 정의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연극에 대한 본질적 이해를 공통으로 가지고 떠나야 대중연극에 대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기에 간략하게 정리해 보고자 한다.
위에서 대중연극을 영어로 popular 'drama' 또는 'theater'라고 했는데 drama 와 theater는 둘 다 연극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의미상의 차이가 있다. 연극을 drama 라고 했을 때에는 연극에서도 희곡(play)  또는 희곡문학을 주로 가리키며 theater라고 하면 극장(playhouse) 또는 연기, 연출, 무대장치, 조명 등 연극공연의 실제적인 측면을 주로 가리킨다. 이는 drama의 어원이 'to act'에서 theater의 어원이 'to see'에서 나왔다는 것과 연관이 있다. 연극은 배우가 무대 위에서 연기(acting)하는 것을 관객이 본다는 것(seeing)이라고 쉽게 정의했을 때 알 수 있듯이 drama는 연극의 내용을, theater는 연극의 형식을 강조하는 말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잠시 대중연극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 서둘러 이해를 돕고자 한다면 대중연극은 내용으로 승부를 거는 연극인가 아니면 형식으로 승부를 내고자 하는 연극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작품속에 담긴 작가의 사상과 주의 주장으로 관객을 공략하는 연극이 있고 내용보다는 화려한 무대정치(그 것도 수시로 변하는), 현란한 조명, 요란한 의상 그리고 빵빵한 음향으로 관객을 사로잡으려는 연극이 있다면 어느 것이 대중연극에 가까운가? 마이클 잭슨의 쇼무대나 뮤지컬 한 두 편이리도 본 사람이라면 물론 누구나 후자일 것이라고 자신있게 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대중연극을 영어로 쓸 때 popular drama라고 하기 보다 theater라고 할 때 더 설득력이 있음을 짐작했을 것이다. 곧 대중연극은 drama보다는 theater를 강조하는 연극임을 알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중예술의 이해라는 제목의 이 책에서는 popular drama가 아니라 popular theater에 대하여 마땅히 서술해야 할 것으로 기대하겠지만 theater의 측면은 거의 다루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책의 의도는 대중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를 심고자 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지 대중예술을 어떻게 하면 잘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한 방법이나 기술을 실천적으로 가르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극에 대하여도 대중연극이란 무엇인가를 이해시키는 데 주안점을 둘 뿐 대중연극의 기법을 습득케 하려는 의도는 가지지 않는다. 그래서 대중연극의 drama로서의 측면을 중심으로 기술해 나갈 것이다.
이제 다시 연극으로 돌아와서 연극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얘기를 계속해 보자. drama, 곧 희곡 또는 희곡문학의 측면으로 보았을 때 연극은 시, 소설, 수필, 평론과 더불어 문학의 한 장르이다. 소설이나 수필, 평론같은 산문 문학은 18세기 무렵에 등장한 비교적 근대의 산물이지만 시와 희곡은 매우 일찍 태동한 문학의 장르로 희곡은 시 다음으로 서양의 경우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 시대에 이미 황금기를 누렸다. 어쩌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극의 시대로 일컬어지는 이 시기에 도시 국가에 불과한 아테네에 에스킬러스, 소포클레스와 유리피데스의 3대 비극 작가와 작품들은 상당수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어 위대한 고전으로 변함없이 사랑받고 있으나 당시에는 문학작품으로 읽혀지기 보다 객석 1만명이 넘는 큰 야외극장에서 대낮에 공연되는 것으로 그 생명력을 발했다.
당시엔 물론 인쇄술도 없었지만 연극은 무대 공연으로 보여지는 것이 본령이었으며 희곡이 일반 독자들에게까지 널리 읽혀지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현대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연극은 따라서 문학의 한 장르이면서 동시에 무대 공연의 재료(상연 극본)로서 무용, 음악 등과 함께 공연 예술(performing arts)에 속한다. 이 같은 연극예술의 이원성은 연극의 약점이자 동시에 강점이 되기도 한다. 문학과 공연의 양쪽에서 모두 서자취급을 받기도 하지만 일회성을 숙명으로 하는 공연예술과는 달리 희곡문학작품으로 길이 남는다는 이점을 누리면서 동시에 공연예술로서 가지는 현장성(immediacy)을 함께 누린다. 문학작품이나 미술, 영화 등처럼 창작이 완료된 상태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공연(live performance)'으로서 창작의 순간을 관객이 직접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체험하는 특유의 전달방식에 의존하는 공연예술은 그만큼 강렬한 정서적 효과(emotional impact)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공연의 재료가 되는 희곡은 글로 쓰여지는 같은 문학의 장르인 시나 소설과는 달리 체험의 양태도 매우 객관적이다. 시와 소설은 모두 화자가 시인이나 소설가 자신이다. 시인, 소설가가 직접 독자에게 말하는 형식, 곧 서술(narration)에 의존하지만 희곡의 경우는 비록 글은 극작가가 쓰지만, 그가 직접 얼굴을 내밀지는 않는다. 극작가는 허구의 인물들을 등장시켜 그들의 행동(말과 몸짓 등 모두 포함)을 통해 그의 의도를 전달하며 작가는 배후에 숨는다. 관객은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보고 들으며 그 스스로의 인생 체험에 견주어 판단을 내릴 뿐 극작가의 주관에 내맡기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소설가라면 어느 등장인물에 대하여 직접 얼굴을 내밀고 독자에게 "이 사람은 나쁜 사람입니다." 라고 친절하게 가르쳐 줄 수 있지만 극작가는 그 인물로 하여금 관객에게 나쁜 사람으로 보이도록 행동을 하도록 할 수는 있어도 직접 나서서 관객에게 가르쳐 줄 수 없다. 결론적으로 소설은 서술(narration)에 의존하는 예술이라면 연극은 행동(action)에 의존하는 예술이라는 것이다.
인류 최초이자 가장 위대한 연극예술의 이론가로 알려진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poetics)>에서 연극에 대하여 가장 간명한 정의를 내린 바 있다. 곧 연극이란 "행동하는 인간의 구현이다(Representation of man in action)", 가 그 것인데 이는 연극의 본질은 행동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앞에서 drama의 어원이 'to act'에서 왔다는 말을 상기해 주기 바란다. 연극은 인간(배우)의 행동을 통해서 작가의 사상과 감정을 전달해 주는 예술이다. 우리가 연극을 보러 간다는 것은 곧 연극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행동(말, 표정, 제스처 몸짓 등)을 보러 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 연극이나 보러 가지는 않는다. 재미있는 연극을 골라서 보러 간다. 그러면 어떤 연극이 재미있는 연극인가? 연극을 본다는 것은 인물의 행동을 보는 것이라고 했으니 이 질문은 다시 어떤 행동이 재미있는 행동인가, 라는 물음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놀랍고 신기하고 이상하고 특이한, 한마디로 낯설은(strange) 행동을 보기를 기대하고 연극이나 영화를 보러 가지 매일 주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상투적이고 평범하고 일상적이고 진부한, 한마디로 낯익은(familiar) 행동을 보기 위해 시간과 돈을 들여가며 드라마를 보러 가지는 않는다.
그런데 어떤 드라마(연극이든 영화든 TV연속극이든)가 시종일관 낯설은 행동만 보여준다면 과연 우리는 그 드라마를 재미있게 볼 수 있을까? 드라마가 시작해서 10분, 20분이 지나도 계속 낯설은 행동만 보여준다면 대다수의 관객들은 참지 못하고 극장문을 나설 것이다. 성공적인 드라마라면 낯설은 행동을 먼저 보여주어 관객의 흥미를 유발시킨 뒤에 낯설은 행동을 낯 익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신기하게만 보였던 낯설은 행동이 점차 낯익게 느껴질 때 관객은 무릎을 치며 공감하고 재미를 맛보게 된다. 이렇게 드라마의 행동은 낯설음(strangeness)과 낯익음(familiarity)을 동시에 보여주어야 관객을 만족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행동이 낯익다고 느껴지려면 어때야 하는가? 첫째 식별가능(recognizible) 해야 한다. 처음 아프리카 우간다 말을 들으면 잠시 신기해서 흥미를 느끼지만 말을 알아들을 없으므로 곧 무관심해질 것이다. 그러니 한국에서 우간다말로 연극을 하는 일은 무모한 일일 것이다. 둘째 납득 가능(convincing) 해야 한다. 어떤 행동을 우리가 납득할 수 있다는 것은 그 행동의 동기(motive)를 우리가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뜻이다. 세상에 동기가 없는 인간의 행동은 없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자듯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할 때에는 반드시 동기가 있어야 한다. 배 고플 때 잠을 자고 졸릴 때 밥을 먹는다면 우리는 그런 행동을 납득할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그 행동을 재미있게 볼 수 없을 것이다.
인간행동의 동기는 가장 저차원의 신체적, 생리적 동기에서부터 사회적, 심리적, 지적, 미적 동기에 이르기까지 그 안에 셀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동물의 세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생명체라면 무의식적이건 의식적이건 반드시 동기가 있어야 행동을 한다. 무의식적인 행동의 동기는 본능일 것이고 의식적인 행동의 동기는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일 것이다. 인간은 후자의 경우가 타 동물에 비하여 발달되었다. 그런데 이 것들 말고도 동물의 세계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으나 유독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행동의 동기가 있다. 그 것이 곧 도덕적 동기(moral motive)이다. 도덕적 동기란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판별하고 그에 입각한 행동을 유발하는 동기이다. 신의 영광을 위하여, 정의와 사랑과 조국을 위하여 목숨까지 걸고 행동에 뛰어드는 일은 인간세계에만 존재한다. 아무리 영특한 개라도 단지 남의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굶주림을 참고 눈앞의 음식을 외면하지는 않는다.
이 도덕적 동기는 인간의 모든 행동의 배후에 자리잡고 있다. 아무리 사소한 행동을 할 때에도 도덕적 판단은 멈추지 않는다. 뚜렷하게 의식적이 아닐 경우에라도 과연 내 행동이 도덕적으로 옳은가 그른가에 대한 판단없이 행동에 옮기지는 않는다. 그 동안 수없이 되풀이 되어온 습관적인 행동들은 이미 도덕적 검증을 거쳤기 때문에 매번 의식적으로 도덕적 판단을 내릴 필요가 없겠으나 처음 시도하는 행동이라면 반드시 내 행동이 옳은가 그른가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먼저 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그른 쪽을 선택하더라도 최소한 자기 행동이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은 알고 행동에 옮긴다. 물론 그럴 경우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자기 합리화 내지 정당화의 구실은 붙이겠지만.
우리는 앞에서 연극의 본질은 인간의 행동이며 연극은 배우를 무대 위에 내세워 인간의 행동을 그려 보여 주는 것이라고 했는데 '동물의 세계' 같은 다큐멘터리에서 동물의 생태를 단지 기록(촬영)해서 보여주듯이 인간의 행동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만 한다면 그 것은 연극이 아니다. 연극에서 그려지는 인간의 행동은 그의 도덕적 판단이 개입된 의미있는 행동(meaningful action)이어야 한다. 따라서 작가 또는 연출가는 연극 속에서 인간을 그림에 있어서 그 자신의 도덕적 입장(moral view)을 반드시 드러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작품의 주제(theme)가 드러나게 된다. 아무리 저급한 오락 드라마라 해도(그럴수록 더) 그 안에 주제 또는 도덕적해석이 담기지 않으면 안된다. 가령 오락 활극 영화를 보러 극장에 들어갔는데 시간이 늦어서 중간쯤에 들어갔다고 하자. 화면에는 신나는 전투장면이 펼쳐지고 있으며 관객들은 손에 땀을 쥐고 재미있게 영화를 보고 있다. 그러나 늦게 들어간 이 관객은 똑같은 화면을 보고 있으면서도 어리둥절할 뿐 별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어느 편이 도덕적으로 정의로운 편에 서 있으며 누가 악당인 지를 모르기 때문이며 또 그들이 왜 싸우는 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관객은 도덕적으로 옳은 편(곧 주인공)과 자기를 동일시하려는 심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누가 내 편인 지를 모르는 동안은 아무리 신나는 활극이 펼쳐져도 별 재미를 느낄 수 없게 된다. 심지어 도덕적 판단과는 무관한'동물의 세계' 같은 다큐멘터리나 스포츠 경기를 보면서도 관객은 도덕적 성향을 드러내 보인다.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사슴에게 동정을 하게 되고 한 일 친선 축구경기를 하면 한국인은 죽어라고 한국팀을 응원한다. 사슴은 착하며 사자는 나쁘고 한국은 선하고 일본은 악하다는 도덕적 판단을 은연중 가지고 있기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연극은 도덕적 판단이 게제된 인간의 의미 있는 행동을 그려보여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행동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기준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적어도 19세기까지 서양의 인류(동양의 경우는 유교사상?)는 기독교 신앙 또는 윤리 안에서 도덕동기의 기준을 찾았다. 다시 말해서 19세기 전반까지의 서양의 인류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판별할 수 있고 모두가 동의하는 '보편적'인가치 기준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 기준은 인간의 권능 바깥의 어떤 초월적, 절대적 존재 곧 신으로부터 주어진다고 믿었다. 이 기준에 의하여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 옳은 행동과 그른 행동이 나누어 질 수 있었다. 비록 사람은 악의 유혹에 빠지기 쉽고 선을 행하기 어려운 존재이지만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원칙만은 가지고 있다고 믿었으며, 때로 현세에서 선이 보상받지 못하고 악이 승리하는 듯이 보이더라도 내세에 가서만은 선이 보상받고 악이 징벌당할 것이라는 신념만은 확실히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 바깥의 어떤 초월적 존재가 인간사에 개입하고 있다는 이 같은 생각은 르네상스 시대로부터 서서히 도전받아 왔으며 이 것이 하나의 사상적 체계를 이루게 된 것은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였다. 서양의 정신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다 준 최초의 업적은 촬스 다윈의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 1859)>이었다. 이 책은, 인간은 신에 의하여 특별히 선택된 피조물이라는 종전의 관념을 뒤엎고 모든 생명체는 동일한 조상에서부터 서서히 진화되어 왔으며 이 진화의 과정은 선한 자를 살리고 악한 자를 없애는 신의 개입에 의해서가 아니라 적자생존의 법칙에 의하여 자연적 선택의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져 왔고 모든 생명은 신의 의지가 아니라 유전과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고 설명했다. 다윈의 이 같은 이론이 가져다 준 가장 큰 사상적 전환은 신 또는 초월적 섭리가 떠맡아 왔던 역할이 그 중요성을 잃어 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인간이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환경과 유전의 산물로서 필연적인 진화의 과정을 거쳐왔다고 했을 때 종전의 도덕에 대하여 부여해 왔던 의미가 크게 약화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다윈의 이론이 내포한 심대한 의미가 즉각적으로 알려지고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다. 비록 인간의 육신은 생물학적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할지라도 인간의 정신마저 단순한 자연법칙의 산물이라고 쉽사리 믿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프로이드가 <꿈의 해석(The Interpretation of Dream, 1900)>을 위시한 일련의 저서를 통해 인간의 이성적 능력은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다는 주장을 내놓았을 때 다윈의 이론은 인간의 전 영역으로 확대될 수 있었다. 프로이드에 의하면 선을 행하려는 욕구 또는 양심이라는 것도 이성적 선택이거나 타고난 충동이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징벌과 보상에 의해 후천적으로 습득되어진 것일 뿐이다. 따라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인간의 행동이 어떤 절대적인 원천에서부터 유래한다는 생각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다윈과 프로이드의 이론은 현대사상의 근간을 과학적인 토대위에서 대변해 준 최초의 업적일 뿐 현대라는 시대가 그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그들의 이론 가운데 천명된 생각들은 그들과 동시대의 다른 사상가들 및 인접 예술가들에게도 각기 다른 입장에서 다른 방식으로 알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절대적 가치 기준의 상실은 현대사상의 저류에 깔려 있는 공통적 인식이며 이 연극 예술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옳고 그름을 판별할 수 있는 도덕적 기준의 상실은 연극예술의 존립기반을 근저에서부터 무너뜨려 현대라는 시대는 곧장 연극의 위기로 치닫게 된다. 연극의 본질은 행동이며 모든 행동의 배후에는 도덕적 동기가 있어야 하고 그 동기는 누구나 동의하는 절대적 도덕의 기준이 엄존해 있어야 유발되는 것인데 이 절대적 도덕적 기준이 사라졌다면 연극은 더 이상 쓰여지고 만들어 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제 막다른 존망의 위기에 처한 연극은 중대한 갈림길에 놓이게 된다. 신으로 대표되는 절대적 도덕적 기준이 사라졌다는 달갑지 않은 진실을 정직하게 받아들이고 외롭고 험난한 가시밭길을 걸어가야 하느냐 아니면 진실을 외면하고 회피하면서 연극의 통속적 재미만을 추구해야 하느냐의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이 것이 바로 순수연극(serious drama)과 대중연극(popular drama)의 갈림길이다. 연극예술이 순수연극과 대중연극으로 갈라지게 된 것은 19세기 중반 이후, 곧 현대연극의 등장과 더불어서이다. 그 이전의 연극사에 있어서는 고급연극과 저급연극의 구별은 있었을 지언정 순수와 대중으로 나뉘지는 않았었다. 고급연극이라면 문학성을 바탕으로 하는 비극, 희극류의 연극을 가리키고 저급연극이라면 연희성을 위주로 한 가벼운 소극류의 연극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와 로마시대를 거쳐 셰익스피어를 배출한 영국의 엘리자베스조와 르네상스 이후까지도 관객의 계층간의 구별은 없었다. 모든 연극을 모든 게층의 관객이 다 함께 관람했다(일부 궁정 극장의 경우를 제외하곤). 질적 수준(또는 지적수준)의 차이는 있었다 해도 인생과 우주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는 없었다. 영국의 시인 브라우닝의 말대로 "신은 천상에 계시고 세상에는 아무 일도 없다."라는 낙관적론에 기초하고 있었다. 고급연극이든 저급 연극이든 그 안에는 절대적 도덕적 기준에 대한 믿음이 엄존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같은 전통적 믿음이 붕괴되면서 현대사상이 대두하자 연극은 순수연극과 대중연극으로 나뉘면서 둘은 대립적, 적대적 관계로 맞서게 되었다. 순수연극은 현대사상을 받아들이면서 현대연극의 진로를 정직하게 모색해 나가게 되고 그러자니 의미있는 극행동을 부여할 수 없게 되어 연극은 비록 현대인의 삶을 진실되게 포착해 내었다고 하더라도 통속적인 재미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대중연극은 삶의 진실은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통속적인 재미를 붙들어야 하기 때문에 현대사상을 회피하는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현대사상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재미를 포기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미 설명했듯이 현대사상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인간의 행동에 동기를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이고 동기가 없이는 행동이 있을 수 없으며 행동이 없는 연극은 당연히 재미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중연극은 현대사상을 외면한 채 전통적 믿음(절대적 도덕적 기준이 엄존해 있다는)을 그대로 답습하여 그 안에서 과거와 같은 행동의 동기를 끌어내어 극 행동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시대정신은 바뀌었어도 오늘날의 대중연극에는 여전히 신과 정의와 사랑과 조국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영웅적인 인물들이 등장한다. 어차피 일반대중은 실생활에서 현대사상이란 것을 첨예하게 의식하지도 않으며 드라마를 통해서 단지 하룻저녁의 위안을 얻는 데 만족하기 때문에 대중연극은 19세기 중엽의 산업혁명의 여파로 인구의 도시집중 현상이 빚어지고 그로 인하여 불어난 노동자 계급을 대상으로 산업화에 성공하였으며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새로 등장한 영화, TV 등의 매스미디어로 대부분 이동하여 사상 유례없는 호황을 누려왔다. 반면에 순수연극은 선택된 소수의 지식인 계급을 대상으로 정부와 공공의 지원에 힘입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대중연극은 지금은 사멸한 전통적 믿음을 차용하여 극중 인물의 행동에 동기를 부여해서 신 바람 나는 극 행동을 꾸미기는 해도 대중연극을 만드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진심으로 그 동기를 믿지는 않는다. 그 것은 다만 재미있는 사건을 만들기 위한 연극적 장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들도 알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선은 보상받고 악은 징벌 받는다는 전통적 믿음은 시적 정의(poetic justice)일 뿐 현실의 경험과는 배치된다는 것을 모르지 않기 때문에 대중연극은 불가불 그 노선을 따르더라도 그 점을 결코 강조하지 않는다. 따라서 결말에 이르러 주인공이 도덕적 설교를 늘어논다거나 악인이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현대의 관객들은 대중연극을 보면서 재미있는 행동을 즐길 뿐이지 선의 승리라거나 악의 패배 따위에 감명받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말해서 대중연극은 권선징악을 상투적인 주제로 삼기 때문에 가장 도덕적인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부도덕한 연극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삶에 대하여 거짓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 순수연극은 이와는 정반대임을 알 수 있다. 얼핏 보기에 순수연극은 기성도덕을 전면적으로 부인한다는 면에서 가장 부도덕한 것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이 같은 도덕의 부재를 고통스러워하고 모든 사람이 믿을 수 있는 새로운 도덕적 질서의 회복을 간절히 희구하기 때문에 가장 도덕적이며 따라서 정직한 연극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장을 바꾸어 대중연극의 대표적인 장르들에 대하여 살펴 볼 차례이다. 연극의 장르, 곧 극 형태를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하는데 비극(tragedy), 희극(comedy), 멜로드라마(melodrama), 소극(farce) 등이 그 것이다. 이 중에서 비극과 멜로드라마는 인간의 진지한 행동(serious action)을 그리고 희극과 소극은 우스꽝스러운 행동(humorous action)을 그린다. 그런데 이 것은 고전적, 전통적 분류법이고 현대사상의 대두와 함께 극 형태에도 심각한 내적 변화가 일어나 정통적 의미의 비극과 희극은 거의 소멸했다고 믿어지며 비극은 단지 드라마(비극도 멜로드라마도 아니라는 뜻에서)로, 희극은 '어두운 희극(dark comedy)' 내지 '흑색 희극(black comedy)'으로 변질 되었다. 이 것은 순수연극 쪽의 상황이 곧 대중연극과 관련하여서는 멜로드라마와 소극이 있는데 멜로드라마는 가장 뒤늦게 19세기에 들어와서 생겨난 대중연극의 산물이다. 소극은 연극사의 시작과 더불어 생겨난 가장 오래된 장르로서 가벼운 희극 정도로 이해해도 무방하나 웃음을 유발하는 대중연극의 형태를 소극으로 못박기는 어렵기 때문에 여기서는 대중희극을 그냥 '코메디'로 통칭하여 부르기로 한다. 대중연극의 장르 가운데 20세기에 들어와서 가장 각광을 받아온 장르로 뮤지컬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음악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멜로드라마와 코메디수법을 모두 절충한 듯한 이 뮤지컬 장르는 영화나 TV와 같은 매스미디어의 가공할 위력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연극무대를 지켜내고 있는 거의 유일한 대중연극의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이들 대중연극의 장르들을 차례로 살펴보기로 하자.
 
  2.

  1) 멜로드라마

 
멜로드라마는 19세기 낭만주의(romanticism)의 산물이다. 흔히 '연극의 잡초'라고도 불리고 낭만주의 타락한 모습이라고도 일컬어지는 멜로드라마는 프랑스의 극작가 픽세레쿠르(Guilbert de Pixerecourt, 1773-1844)를 선구자로 하는데 평생에 쓴 100편이 넘는 그의 작품들은 전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아 멜로드라마를 크게 유행시키는 데 기여했다. 낭만주의의 부산물 답게 멜로드라마는 관객의 감정에 호소하는 연극으로 기상 천외한 소재와 사건을 즐겨 다루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지만 등장인물들은 종전의 고전비극에서처럼 왕후 장상이 아니라 은행원, 경찰, 행상, 세리, 농부 등과 같이 평범한 인간 군상이었으며 언어도 고답한 운문이 아니라 일상적 산문으로 쓰여져 교육수준이 낮은 하층민 관객들에게도 어필했다.

멜로드라마의 접두어인 'melo' 의 어원은 음악이란 뜻으로 멜로드라마를 글자 그대로 옮기면 음악극이 된다. 이 멜로드라마는 공연 때 시종 배경음악(background music)을 사용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그 이유는 첫째, 당시의 연극규제 법령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대에는 비극, 희극 같은 정통연극은 관허극장만이 독점적으로 공연할 수 있었는데 초기에는 멜로드라마 전문 작가가 흔치 않았기 때문에(당시에는 저작권 법조차 없었으므로) 무면허 극장들(주로 멜로드라마 상연관)은 기존의 비극, 희극 작품들을 표절하여 공연하는 예가 많았다. 이 때 위법행위를 회피하기 위해 멀쩡한 기존 작품을 변조하여 공연하면서 배경음악을 삽입하여 정통연극이 아니라 음악극이라고 둘러댔던 것이다. 둘째, 이 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당시의 무식한 하층민 관객들의 관람을 돕기 위하여 슬픈 장면에는 애절한 음악을 행복한 장면에는 흥겨운 음악을 그리고 위기의 장면에는 그에 알맞는 음악을 연주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매 장면의 이해와 감상을 도우며 심리적 반응을 고조시키는 장치로 음악을 사용했다.
19세기 대중오락의 총아로 군림했던 멜로드라마는 20세기에 영화가 등장하고 이어서 TV가 출현하면서 연극무대로부터 이들 매체에 빼앗겼다. 그 뚜렷한 증거가 오늘날에도 영화나 TV 드라마에는 배경음악이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드라마의 내용 전개 때문에 관객이 어떤 감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음악의 사용 때문이라면 이는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음악을 보조적 수단으로 사용한다 하더라도 이는 관객의 감상능력을 얕잡아 보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영화나 TV 드라마가 처음부터 대중예술로서 출발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며 매스미디어의 성격상 이 틀을 벗어나기도 어려울 것이다.
흔히 멜로드라마라면 젊은 남녀의 사랑을 그린 장르의 드라마인 것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저널리즘이 잘못 유포한 결과이며 실상 멜로드라마는 애정극 뿐만이 아니라 활극, 탐정극, 서부극, 괴기극, SF, 가정극, 첩보극, 전쟁극과 홍콩 무술영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오락극(코메디를 제외한)을 다 포함하는 넓은 장르이다. 우리가 보는 거의 모든 영화, TV 드라마는 멜로드라마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20세기 초에 유행했던 신파극을 연상하면 가장 이해가 빠르겠지만 요즘 선보이는 매우 세련된 할리우드 오락 드라마 역시 멜로드라마에 속한다.
그렇다면 멜로드라는 어떤 드라마인가? 비극과 드라마(drma, 위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연극이란 뜻이 아니라 비극도 아니고 멜로드라마도 아닌 진지한 연극의 종류로 순수연극에 속한다.)처럼 인간의 진지한 행동(serious action)을 그리되 위의 것들과는 달리 주로 우연에 의해 사건이 전개되는 드라마를 가리킨다. 순수연극이 필연에 의해 사건이 전개되도록 그리는 데 반하여 우연에 의존하여 사건이 벌어지기 때문에 멜로드라마에는 똑같은 길이 안에 훨씬 더 많은 크나큰 사건들을 담을 수 있다. 이 것이 멜로드라마의 기본 전략이다. 순수연극처럼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 왜 그와 같은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지를 관객에게 납득시키려면 전후의 과정을 치밀하게 논리적으로 설명해 주어야 하고 그러려면 적잖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지만 멜로드라마의 경우는 아무 전후의 설명 없이 어디선가 악의를 품은 괴한이 나타나서 끔찍한 사건을 저지르기만 하면 족하기 때문에 똑같은 길이의 시간 동안에 많은 양의 사건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이 같이 멜로드라마는 흥미로운 사건 중심이기 때문에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심리에 대하여도 길 게 묘사할 겨를이 없다. 주인공은 착하고 잘 생기면 그만이고 주인공을 괴롭히는 인물은 악하고 힘세고 못생기면 된다. 멜로드라마의 구성(plot)은 간단하다. 선의의 주인공이 위기에 처한 뒤 필사의 노력으로 이 위기에서부터 탈출하려고 애쓰는 것이 전부다. 대체로 주인공이 위기로부터의 탈출에 성공하여 해피엔딩(happy ending)으로 끝나지만 그 반대로 죽거나 파멸 당하는 언해피엔딩(unhappy ending)으로 끝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이 경우 주인공은 무죄한 희생자(innocent victim)로서 그 자신이 불행에 대하여 주인공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고 따라서 책임도 없으며 무한한 동정의 대상이 될 뿐이다. 왜냐하면 그는 아무런 적극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으며 오직 악의의 세력으로부터 도망질 치는 소극적인 행동만을 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객은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을 억울한 희생자로 보고 동정을 베푸는데 이 때의 동정심을 가리켜 페이소스(pathos)라고 한다. 이 페이소스는 비극의 주인공이 파멸당했을 때 관객이 느끼는 동정심을 말하는 비극적 체험(tragic experience)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비극의 주인공은 멜로드라마의 주인공과는 달리 그 자신의 불행을 자초하는 적극적인 행동을 벌이며 그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파멸하게 된다. 그리고 파멸의 결과로 관객들에게 삶에 대한 각성(recognition)을 안겨 준다. 똑같은 동정심이라도 비극의 주인공에 대하여는 관객들이 자기 보다 우월한 존재에 대하여 경배 어린 동정심을 바치지만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에 대하여는 관객이 오히려 우월감을 느끼며 그에게 동정을 베푸는 것이다. 멜로드라마는 보고나서 관객이 자기의 처지가 드라마의 주인공 보다 낫다는 느낌을 가지며 위안을 얻고 현실에 안주하도록 만들어 준다. 이 점에 대중예술로서 멜로드라마의 특성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이 멜러드라마는 우연에 의한 사건을 그리기 때문에 관객은 숨 돌릴 새 없이 전개되는 사건을 보며 재미를 느끼기는 해도 관객에게 교훈, 또는 깨달음을 줄 수 없다. 가령 아파트 10층 베란다에서 떨어진 아기아 우연히 부는 바람 때문에 나뭇가지를 스치고 널어놓은 이불 빨래에 부딪히고 푹신한 잔디밭에 떨어져서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하게 살아난 장면을 보고 신기하게 생각하며 절묘한 우연에 재미를 느낄 지는 몰라도 이를 보고 자기 아기를 10층 베란다에서 떨어뜨려도 좋다고 생각하는 관객은 없을 것이다. 멜로드라마가 이렇게 절묘한 우연에 의존하여 황당무계한 사건을 펼쳐 보이므로 관객은 점차 식상하게 되고 이를 만회하기 위하여 멜로드라마는 변신을 시도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멜로드라마를 가리켜 '잘 꾸며진 연극(wellmade play)이라고 하는데 프랑스의 극작가 으젠느 스크리브(Eugene Scibe, 1791-1861)로부터 시작되었다. '잘 꾸며진 연극' 이란 말은 오늘날에는 칭찬의 의미가 아니라 지나치게 인위적이란 뜻으로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지만 당시에는 천편일률적인 멜로드라마에 물들었던 관객들에게는 신선하게 논리성을 갖춘 연극으로 환영받았다. '잘 꾸며진 연극'은 이름처럼 논리적이고 정연하게 구성이 짜여진 연극으로 극의 사건이 돌발적이고 우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전에 치밀하게 예고되고 복선(foreshadowing)이 깔려서 일어나도록 하며 사건의 진전은 인과 관계(causal relationship)에 의존하도록 짜여진다. 이런 극의 등장인물은 대체로 단순하며 친숙한 인물 유형으로서 그들의 목적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에 성공하는 것인데 그들 앞에 여러 가지 장애가 가로 놓이고 이로 인해서 파생되는 위기감이 극적 흥미의 초점이 된다. 관객의 관심은 시종 "다음엔 무슨 일이 일어날까?(what will happen next?)" 에 쏠리게 된다. 그러나 스크리브의 '잘 꾸며진 연극' 은 흥미본위의 위기감의 조성을 위하여 인물 창조나 주제의 깊이가 없기 때문에 사실주의(realim)라는 현대의 순수 연극으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비록 사실주의의 단계에는 못 미치더라도 멜로드라마는 한 단계 더 발전하여 뒤마 아들(Alexandre Dumas fils, 1824-95) 에 이르러 소위 논제극(thesis play)이 등장한다. 논제극은 인간과 사회의 시사성(topicality)이 있는 구체적인 이슈를 소재로 하여 그 문제에 대한 토론과 검증을 통하여 작가의 주장을 담은 연극이다. 멜로드라마가 단지 우연에 의하여 벌어지는 흥미있는 사건만을 그려보이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연극을 통하여 사회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커다란 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뒤마의 논제극은 비록 사회적 이슈를 다루기는 했으나 내용 전개에 있어서는 '잘 꾸며진 연극'에서 한 발짝도 앞서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닌다. 따라서 작가의 주장은 작품 속에서 우러나온다기 보다 작가의 분신같은 인물의 입을 통해서 생경하게 외쳐질 뿐이다. 연극이 인간과 사회의 문제를 진지하게 제기하며 논리적 과학적으로 파헤치게 되기 위해서는 입센(Henrik Ibsen, 1828-1906)을 위시한 현대 극작가들의 등장과 더불어 사실주의가 확립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으며 이후의 연극은 순수연극의 시대로 접어든다.
그러나 멜로드라마는 '잘 꾸며진 연극' 과 논제극의 단계로까지 발전하고 이후 등장한 사실주의 연극으로부터도 지대한 영향을 받아 초기의 엉성한 모습을 떨치고 매우 세련된, 그래서 때때로 자칫 순수연극으로 오인 받을 정도의 모습으로까지 성숙되어 간다. 그러나 멜로드라마는 멜로드라마이다. 아무리 분단장을 잘하고 위장을 해도 그 안에 냉철한 논리성으로 무장한 현대 사상이 배어 있지 않은 멜로드라마는 대중연극의 장르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이 장을 마치기에 앞서 그런 오해를 받기에 알맞은 작품 한 편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기로 하자.
국내에도 소개된 영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Kramer vs Kramer)>는 한 아이의 양육권을 아버지와 어머니 가운데 누구에게 맡기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유발 시키는 작품으로 널리 알려졌다. 인기스타인 더스틴 호프만과 메릴 스트립이 주연한 이 영화의 첫 장면에서 어머니인 메릴 스트립은 결혼생활이란 것 자체에 회의를 품고 독립된 여성으로서의 삶을 찾기 위하여 집을 나가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남편으로서 아무 잘못이 없는 더스틴 호프만은 청천벽력같은 아내의 가출로 말미암아 어린 아들을 홀로 키워야 한다. 살림에 서투른 호프만이 아이를 기르기 위하여 직장까지 잃고 온갖 고초를 겪으며 아이를 기르는 과정이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 눈물겨운 부성애에 관객들은 이미 냉정을 잃고 아버지의 편이 되어 있었다. 영화가 끝날 무렵에야 어머니인 메릴 스트립이 등장한다. 최고급 승용차를 몰고 화려한 모습으로 돌아온 스트립은 소송도 불사하며 아들의 양육권을 주장한다. 당연히 관객은 스트립을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자, 이 드라마는 순수연극인가 아니면 대중연극인가? 다시 말해서 사실주의 드라마인가 아니면 멜로드라마인가? 얼핏 양육권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룬 드라마인 것으로 오인될 소지가 있으나 이 영화는 갈 데 없는 멜로드라마이다. 왜냐하면 영화 속의 대부분의 시간을 일방적으로 눈물겹게 아들을 키우는 더스틴 호프만의 애절한 부성애의 모습만 보여주어서 그에게 감정적으로 동화되도록 만들었을 뿐 용기있게 가정을 박차고 집을 나가 사회적으로 성공하기까지 메릴 스트립이 여성으로서 겪었을 온갖 고초와 밤마다 두고 온 아들을 그리워했을 모습은 단 한 장면도 보여주지 않았다. 작가는 일방적으로 아버지의 편만 들어준 것이다. 그래놓고 아버지와 어머니 중에서 누가 더 양육권을 가질 자격이 있느냐는 이슈를 제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영화는 진지하게 사회문제를 다루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을 뿐 갈 데 없는 멜로드라마인 것이다.
이 같이 멜로드라마는 순수연극을 위장하여 격조를 높이고 극적 감흥을 묵직하게 만드는 데 이용할 뿐 진지한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는다. 극의 결말도 항상 낡은 도덕이 승리하는 것으로 맺지만 그 것이 낡은 것이라는 것을 만든 사람이 더 잘 알기 때문에 그 점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영화 <007>의 엔딩에서 악당이 회개하는 모습도 없고 주인공 제임스 본드는 미녀와 함께 침대 속으로 뛰어들 뿐 도덕적 설교 따위를 늘어놓지도 않는다. 한 때 인기를 모았던 TV 연속 수사극 <형사 콜롬보>의 경우는 한 술 더 떠서 정의의 편인 주인공 콜롬보를 의도적으로 미화하지 않고 외모도 볼 품 없는 데다가 항상 입에 시가를 물고 다니는 어리숙한 인물로 그리면서 반대로 악당은 멋있고 세련된 인물로 대조적으로 그린다. 결말에 가서 악당이 마침내 체포되어 감옥으로 향하면서도 악당은 회개는커녕 의연한 모습을 보이며 다만 형사 콜롬보와의 두뇌게임에서 진 데 대하여 분을 삭이며 다음에는 이 같은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지 하는 결의를 다짐하는 모습만 보인다.
결론적으로 현대의 멜로드라마는 극적 재미를 위해서 부득이 낡은 도덕을 차용할 뿐 권선징악의 의도도 없고 내비치지도 않는다.결론만 빼고 나면 오히려 마치 악을 권장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요즘 유행하는 우리나라 조폭 영화도 이런 흐름을 뒤쫓아 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런 것이 대중연극의 전략이다. 대중연극은 선을 권장할 생각도 악을 권장할 생각도 없으며 다만 흥행수입을 노릴 뿐이다. 상류층의 불의와 부정부패를 보면서 멜로드라마의 주 관객층을 이루고 있는 피지배계층은 멜로드라마속의 악인을 미화, 예찬함으로소 이들이 현실속의 부패계층 보다 차라리 낫다고 야유를 보내면서 통쾌감을 만끽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역설적 현실 풍자인 셈이다. 이 같은 대중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하여 흥행수익을 높이고자 하는 것이 대중연극의 속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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