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njung Theatre Company

   대중예술의 이해
성균관대학교 공연영상문화연구소 기획 | 정진수 | 정용탁 외|

대중연극, 알고 보기(두 번째 페이지)
글 : 정진수

     2) 코메디

 
코메디는 우스꽝스러운 인간의 행동을 그려보여주어서 웃음을 유발시키는 연극이다. 웃음을 자아내는 인간의 행동이란 '정상으로부터 이탈(deviation from normality)' 된 행동인데 다만 이 행동이 '파괴적이거나 고통스러운 것' 이어서는 안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시학>에서 말하고 있다. 예컨대 수업을 하려고 교실에 들어온 선생님의 콧잔등에 밥풀이 묻었다면 학생들은 웃음을 터뜨리겠지만 밥풀이 아니라 독거미가 앉아 있다면 웃을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 행동은 웃읍기는커녕 진지하다 못해 심각한 행동이 아닐 수 없으므로 코메디가 아니라 멜로드라마감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코메디는 파괴적이거나 고통스럽지 않으면서 정상을 이탈한 행동을 그려야 하는데 이 말 속에는 인간 행동의 '정상성'이 전제됨을 알 수 있다. 관객은 코메디의 등장인물들이 정상을 이탈한 행동을 보고 웃음을 터뜨리며 우월감을 맛본다. 그런 의미에서 평균적인 관객들 보다 열등해 보이는 코메디의 등장인물들이 어처구니 없는 기상천외한 행동들을 벌이다가 마침내 정상으로 되돌아오며 코메디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결말에 이르러 관객들은 정상성의 엄존함을 새삼 재확인하며 안도하게 되며 극중에서 벌어졌던 비정상성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따라서 코메디는 '교정의 기능(corrective function)'을 수행한다.
이 세상이 비정상적인 행동으로 가득차 있다면 따라서 코메디는 쓰여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앞에서 현대에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절대적 도덕적 기준이 사멸했다고 말했다.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 모호해진 현대에는 코메디가 쓰여지기 어려우며 설사 쓰여진다해도 그 때 자아내는 웃음은 밝고 명랑한 웃음(정상의 재확인에서 오는)이 아니라 어둡고 씁쓸한 냉소적(sarcastic, cynical) 웃음이 되고 말 것이다. 이미 코메디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현대의 대중적 코메디는 멜로드라마의 경우처럼 정상성이 사라졌거나 모호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엄존하는 양 치부하고 극 행동을 꾸밀 수밖에 없다. 이런 코메디는 대중연극에 속할 수밖에 없다. 그 정상성이 엄존한다고 믿었던 현대 이전의 시대에는 코메디가 순수연극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순수와 대중의 구별이 없었고 다만 고급희극과 저급희극의 구별만 있었지만) 그래서 아리스토파네스나 셰익스피어, 몰리에르 등의 희극은 고전으로 치부되며 순수연극의 카테고리에 포함된다.
현대의 대중연극에 속하는 코메디는 멜로드라마처럼 선과 악, 옳은 것과 그른 것이 뚜렷이 구분되는 이분법적 세계관을 밑바탕에 깔면서 선이 악의 유혹에 빠질 듯하다가 마침내는 이를 극복하고 선으로 되돌아오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이런 코메디는 대체로 사생활, 곧 가정적 소재를 다루며 여기서 벌어지는 정상을 이탈한 행동이란 대체로 기혼남녀가 외간 남자나 여자의 유혹을 받아 가정이 위기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 상투적인 내용을 이룬다. 이제 그 전형적인 예로서 한 작품을 들어 살펴보자. 요즘도 자주 공연되는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의 <윈더미어부인의 부채(Lady Windermere's Fan, 1892)>는 멜로드라마와 코메디의 전형적 특성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주인공 윈더미어 부인은 청교도적 도덕관을 지닌 보수적인 여성으로 남편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그런데 남편이 얼린 부인이라는 수상한 여자와 염문을 뿌린다는 소문을 듣고 갈등한다. 평소 그녀를 사모하던 남편의 친구 달링튼 경이 이를 눈치 채고 그녀를 찾아와서 사랑을 고백하며 부정한 남편을 버리고 자기와 함께 외국으로 사랑의 도피를 결행할 것을 제의한다. 이튿날 그녀의 생일을 축하하는 무도회에 얼린부인을 초청하여 모든 사람들이 둘의 관계를 의심하게 만든다. 이에 남편의 부정을 확신한 윈더미어 부인은 마침내 가정을 버릴 것을 결심하고 집을 나가 달링튼 경의 집으로 간다.
그러나 실상 남편은 부정한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젊은 시절에 집을 나간 윈더미어 부인의 생모인 얼린 부인의 협박에 못이겨 그녀의 런던 사교계 복귀를 도와준 것 뿐아었다. 부정이 아니라 오히려 아내를 보호하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차마 아내에게 실토할 수 없었던 것 뿐이었다. 이 같은 사정을 알 길 없는 윈더미어 부인이 달링튼 경의 집에서 혼자 그가 귀가하기를 기다릴 때 우연히 이를 알 게 된 얼린 부인이 나타나서 신분을 감춘 채 모성애를 발휘하여 윈더미어 부인으로 하여금 남편에게 돌아갈 것을 호소하고 윈더미어 부인도 마침내 그 충고를 받아들여 집으로 돌아온다. 관객의 흥미를 돋우기 위한 잔가지들은 빼고 기둥 줄거리만 간추리자면 이와 같다.
결혼과 애정의 신성함을 믿고 따라서 부정한 행동을 저지르는 것은 부도덕하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윈더미어 부인이 가정을 버리고 외간 남자와 사랑의 도피를 결심한 것은 남편의 외도에 대한 실망과 복수 때문이었다. 그러나 실상 남편은 외도를 한 것도 아니며 윈더미어 부인 또한 남편에 대한 사랑이 식은 것도 아니었다. 순전히 오해에서 빚어진 행동이었을 뿐이며 곧 정상으로 되돌아와 연극은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결혼과 애정의 신성함으로 대표되는 기성도덕은 조금도 금 가지 않고 재확인 되었으며 윈더미어 부인의 가출은 한마당 해프닝이었을 뿐이다. 관객은 윈더미어 부인의 과감한 행동에 스릴을 느끼며 즐거워하면서도 마침내 가정으로 돌아오는 결말에 대하여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을 것이다. 기성도덕과 타협하고 거기에 안주하는 데서 이 작품은 대중연극의 울타리안에 들어온다.
그러나 순수연극의 작가인 사실주의 연극의 선구자 입센은 그 보다 13년 전에 발표한 <인형의 집(A Doll's House, 1879)>에서 여주인공 노라로 하여금 가정을 박차고 나오도록 만들어 가위 혁명적인 충격파를 일으켰다. 더욱이 남편이 외도를 한 것도 아니고 가정을 소홀히 한 것도 아니며 단지 아내를 인격체로 대하지 않고 인형으로 취급한다는 데 불만을 품고 남편과 자녀를 버리고 집을 뛰쳐나온다는 것이 당시의 관객들로서는 이해될 리 만무했을 것이다. 그로부터 100년도 훨씬 더 지난 오늘날에는 현대사상의 보급으로 남녀 평등도 놀랄 만큼 달성되었고 부부간의 성격차에 의한 합의 이혼도 예사로운 일처럼 받아들여지게 되었으나 아직도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도덕적 원칙이 존재한다는 관념은 대중사회에 뿌리박혀 있다. 다만 도덕적 수준이 시대의 변천에 따라 매번 수정되어 간다는 것이다. 이는 지역에 따라 계층에 따라서도 편차가 있는데 어제까지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 오늘에 이르러는 별 일 아니었던 것이 다시금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기도 한다. 이렇듯 도덕적 수준은 시대에 따라 변하지만(그 것도 대체로 개방 지향적인 쪽으로) 적어도 대중 사회에 있어서 도덕적 원칙이 송두리째 뿌리 뽑히지는 않고 있다. 과거와 같은 형이상학적 도덕의 절대성은 무너졌어도 사회 윤리적 도덕의 관념은 유지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미 언급했듯이 그와 같은 현세적 윤리관은 시대에 따라 급변한다. 일부 선진국의 일각에서 간혹 벌어지는 부부교환(swapping) 같은 엽기적인 행태들이 언젠가 일상적인 관습으로 자리잡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이다. 대중연극은 특히 코메디는 이렇게 급변하는 도덕의 풍속도를 잽싸게 작품 속에 반영하는 재치를 보이므로 흥행적 성공을 담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종결부에 가서는 항상 당시의 보수적 도덕기준에 타협하고 순응하는 것으로 결말을 맺음으로 화살(검열이나 사회적 제재)을 피해 간다. 이제 그런 예로서 1960년대로부터 80년대까지의 흐름을 대표하는 세 편의 코메디를 예로 들어 설명하므로서 이 장을 맺고자 한다.
남녀의 성도덕을 소재로 삼는 코메디를 가리켜 '섹스코메디(sex comedy)라고 하는데 미국을 대표하는 대중연극의 선봉장을 꼽으라면 응당 닐 사이몬(Neil simon)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근자에 들어서는 순수연극으로의 선회조짐을 보이며 그 증좌로 근엄한 '퓰리처상' 까지 받기도 했지만 그의 히트작들 가운데는 섹스코메디로 분류가 가능한 작품들이 있다. 그 중에서 <열광적 연인들의 최후(Last of Red Hot Lovers)>는 평범한 중년의 셀러리맨이 주인공이다. 그는 가정에 충실하고 직장에 성실하게 살아온 인물인데 황혼에 접어들면서 일생동안에 남들은 흔히 경험하는 외도 한 번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하여 반성하게 된다. 아내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사내로 태어나서 바람 한 번 피우지 않고 생을 마감한다는 것은 반드시 잘하는 짓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 게 되고 마침내 비어있는 친구 아파트를 며칠동안 빌려서 바람 피울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황홀한 외도를 즐길 수 있을 것이라는 최초의 기대와는 달리 막상 파트너를 아파트로 유인하는 데까지는 성공하나 정작 일을 벌이는 데 실패한다. 생전 해본 적이 없는 외도를 하려니 서툰 탓도 있지만 용케 고른 파트너들에게도 문제가 있다. 내리 세 여자를 실패한 되 주인공은 낙담하게 되고 비싼 돈을 주고 빌린 아파트값이 아깝다고 생각되어 급기야 마누라를 전화로 불러내어 외도 아닌 외도를 하는 것으로 막이 내린다.
이 작품의 대중연극으로서의 전략은 기혼 남자가 외도를 계획하고 실천에 옮기려는 데에 있다. 관객의 흥미를 끌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대목이다. 그러나 이 계획이 무난히 성공하는 것으로 끝을 맺으면 이 작품은 패륜적인 연극이 되고 따라서 대중연극으로 성립할 수 없다. 그래서 사이몬은 바람을 피우기로 결심한 남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으면서 미수에 그치도록 만든 것이다. 그러나 70년대에 공연되어 히트했던 또 한 사람의 미국을 대표하는 희극작가인 에이브 버러우스(Abe Burrows)의 <선인장 꽃(Cactus Flower)>에 이르면 도덕성의 수준은 한 단계 발전한다.
이번의 주인공은 카사노바 뺨 치는 바람둥이 치과의사 쥴리앙이다. 그러나 그는 총각이다. 게다가 마음이 약하다. 여자와 사랑에 빠지면 결혼하고 싶어진다. 그런데 결혼을 해 버리면 마음놓고 바람을 피울 수 없다. 그래서 만나는 여자마다 미리 선수를 쳐서 자기는 아내와 세 아이를 둔 기혼남자라고 거짓말을 한다. 그런데 이번에 만난 나이 어린 처녀인 토니에게는 정말 결혼하고 싶을 정도로 사랑에 빠진다. 이미 기혼자라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쥴리앙은 있지도 않은 아내와 이혼을 하기 위하여 자기의 노처녀 여비서인 스테파니에게 임시 아내역할을 해줄 것을 부탁하고 이어서 이혼에 동의한다는 사실을 토니에게 말해달라고 부탁한다. 왜냐하면 토니는 비록 기혼남자와 사랑에 빠질 정도로 당돌한 여자이지만 동시에 남의 가정을 파괴해 가면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정도의 배짱은 없는 순진한 처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어처구니 없는 과정 속에서 쥴리앙은 토니가 아니라 스테파니에게서 진실한 사랑을 발견하고 토니는 자기 또래의 옆방에 사는 작가 지망생인 남자 친구와 사랑에 빠지며 이들은 결국 제 짝을 만나 해피엔딩에 이른다. 결말은 위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사회가 용납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히지만 이 작품은 위의 작품과는 달리 실제로 결혼을 전제로 만나지 않은 남녀가 사랑을 나누고 그 것도 비록 사실은 아니었으나 토니라는 앳된 처녀가 기혼 남자라고 믿었던 남자와 과감한 사랑의 행각을 벌인다. 습관성 바람둥이인 쥴리앙도 상식적인 눈으로 보아 지탄의 대상이 되며 기혼남자와 서슴없이 사랑에 빠져든 토니 역시 예사로운 처녀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다행히(?) 이들이 막판에 가서 각자 자기네들에게 어울리는 제 짝을 찾아가는 것으로 막을 내렸기 때문에 수습은 되었지만 이 같은 설정은 확실히 진일보한 것이다.
그러나 80년대에 이르면 여기서 한 걸은 더 쑥 나아간다. 프랑스의 극작가 마르크 카몰레티의 코메디를 각색한 <만찬에 정장은 사절(Don't Dress for Dinner)>의 경우에는 기혼의 남녀, 그러니까 부부가 각기 몰래 바람을 피운다. 남편 베르나르는 아내가 친정에 간 동안에 애인을 불러들이고 아내 자클린은 남편의 친구와 애인 사이이다. 한 집에서 두 쌍의 남녀가 불륜을 저지르기 위하여 진땀을 빼며 골몰하지만 결국 모두 실패하고 부부는 부부끼리 잠자리에 들고 미혼인 남편의 애인과 아내의 애인이 서로 눈이 맞는 것으로 결말을 보아 위의 작품들처럼 기성 도덕과 적당히 타협하는 것으로 끝을 맺긴 하지만 이 결말만 빼고 나면 이들의 행각은 상식적인 눈으로 보았을 때 가위 엽기적이라고 할 만하다. 이 작품이 위의 두 작품들과 결정적으로 차이가 나는 점은 앞의 작품들에서는 끈질긴 시도는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불륜이 일어나지는 않는가.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오늘 하루 곧 관객 앞에서만 일어나지 않았을 뿐 이미 과거에 여러 번 불륜이 저질러졋었다. 남편인 베르나르는 그의 애인과, 친구인 로베르는 베르나르의 아내인 자클린과 이미 과거에 여러 차례 밀회를 즐긴 사이었다. 오늘만 일어나지 않았는데 그 것도 자신들의 행동을 뉘우친 까닭이 아니라 본의와는 달리 재수가 없어서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우리는 이상 세 편의 섹스 코메디를 통해서 대중연극이 시대의 변천에 따라 어떻게 달리 대처해 나가는지를 살펴보았다. 대중연극은 대중을 붙들기 위하여 시대의 흐름을 바짝 쫓아가면서 당시의 앞서가는 도덕적 수준을 능가할 정도의 위협적 공세를 퍼부어 관객을 자극시킨 뒤에 결말에 가서 기성도덕과 타협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다시 말해서 '치고 빠지는 것' 이 대중연극의 전략인 셈이다.
 

 
3) 뮤지컬
 

 
뮤지컬이라는 대중연극의 장르가 등장한 것은 멜로드라마의 역사와 엇비슷하다. 19세기의 잡다한 대중연극의 형태들, vaudeville, music hall, pantomime, burlesque, extravaganza, revue 그리고 operetta 등의 영향을 받아 서서히 그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한 뮤지컬은 20세기에 들어와서 대중연극의 총아로 군림하게 된다. 다만 멜로드라마는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새로 등장한 영화, TV 등의 매스미디어로 주무대를 옮겨가지만 뮤지컬은 양식(style)의 특성상 연극무대를 고수하고 상업연극의 대명사로 여전히 번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여기서 뮤지컬의 양식적 특성에 대하여 먼저 설명이 필요하다. 멜로드라마의 인기가 절정에 달하던 19세기 중반을 넘어섰을 때 멜로드라마와 멜로드라마를 배태한 낭만주의(romanticism) 사조에 대하여 반발이 일어나면서 사실주의(realism)가 대두하고 이 것이 현대연극의 기폭제가 되었음은 위에서 잠깐 언급했었다. 누차 강조한 바와 같이 연극에서 사실주의 양식이 고개를 쳐든 것은 단지 멜로드라마의 지나친 우연에 의존한 사건 전개에 대한 식상함과 이에 따른 불만 때문만은 아니며 여기에는 인간과 우주를 바라보는 근원적인 시각에 대한 형이상학적 회의가 싹텄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실주의는 모든 기존의 추상적관념의 체계를 부정하고 오직 오관을 통해서 직접 경험이 가능한 세계를 객관적으로 기록하고 기술하는 과학적 태도를 확립했다.
그러나 사실주의의 이 같은 결벽증적 과학적 태도는 그 나름의 한계를 드러내 보였는데 삶과 현실의 일시적 표피를 설득력 있게 재현해 내는 데는 성공한 듯이 보이지만 보다 지속적인 불변의 진실을 포착하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주의에 대한 팽배한 불만은 곧이어 반사실주의(anti-realism) 연극운동으로 이어졌고 그 중요한 흐름중의 하나가 곧 극장주의(theatricalism)였다. 극장주의는 연극이 현실의 겉모습을 그대로 재현해내는 사실주의에 반발하여 연극이 연극임을 솔직히 시인하고 극장성(theatricality)을 숨기지 말고 오히려 드러내 보여주어야 한다는 데서 출발한다. 사실주의처럼 연극 무대에서 펼쳐지는 사건들이 마치 지금 내 눈앞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현실인 것인양 속임수를 쓰지 않고 연극적 장치를 일부러 노출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무대장치를 과감히 생략하며 조명기를 내려뜨려서 보여주고 배우는 연기 도중에 직접 관객에게 말을 걸기도 하는  등의 수법을 사용하므로서 관객들로 하여금 연극관람을 의식하게 만들어주고 연극속에 참여를 유도하기도 한다.
이 같은 극장주의적 수법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뮤지컬이다.그래서 뮤지컬에는 배우들이 때로 관객을 향하여 수작을 걸기도 하고 현실의 삶에서 실제 인간이 사용하지 않는 표현방법들, 곧 춤과 노래를 통해 생각과 감정을 표현한다. 춤과 노래는 사실적 표현방법이 아니라 양식화된(stylized) 표현방법인 것이다. 관객과의 직접적인 교감을 전제로 한 이 같은 극장주의적 표현은 '산 무대(live stage)' 에 알맞는 표현방법이지 영화나 TV 같은 간접매체에는 알맞지 않기 때문에 뮤지컬은 그 풍부한 상업성에도 불구하고 매스미디어에 빼앗기지 않고 연극무대에 잔류하여 그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간혹 히트 뮤지컬을 영화화해서 어지간히 성공한 예들도 없지 않으나 연극무대에서와 같은 충일한 관극체험을 안겨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 것은 뮤지컬의 외형적 틀일 뿐 뮤지컬 또한 내용면에서는 앞에서 보아온 멜로드라마나 코메디처럼 상식적 도덕률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뮤지컬에는 춤과 노래 뿐 아니라 화려한 무대장치와 의상, 현란한 조명 등 풍부한 볼거리와 들을거리가 많으므로  드라마 한 가지로만 승부를 걸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멜로드라마나 코메디 보다 극행동의 자극성은 약하다. 선남선녀가 만나서 사랑에 빠지지만 둘의 결합에는 장애가 따르고 그래서 잠시 시련을 겪지만 마침내 이를 극복하고 해피엔딩에 이르게 된다는 상투적인 줄거리가 뮤지컬의 전형을 이루는데 이 같은 순진한 낙관주의(naive opitimism))에 감명받을 관객은 없을 것이다. 어찌 보면 줄거리는 양념에 불과할 경우가 허다하다.
뮤지컬은 그 상업적 흥행성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주로 영국과 미국에서행해지며 그 것도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발달된 장르이다. 미국에서 최초로 뮤지컬 코메디라는 명칭이 붙여진 작품은 솔스베리(Nate Salsbury)의 <The Brook(1879)>였다. 작품의 내용은 여전히 오페레타처럼 도피적이고 낙관적이고 낭만적이지만 장소와 인물의 설정은 미국을 배경으로 했다. 이 뮤지컬 코메디가 점차 사실적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하며 뒤에 가서는 <West Side Stotry> 처럼 unhappy ending으로 끝날 만큼 심각해지면 코메디라는 단어가 떨어져나가고 그냥 '뮤지컬(musical)' 이라고 불리게 된다. 그런데 뮤지컬 코메디가 인기를 끌 게 된 것은 1890년대에 영국의 에드워즈(George Edwardes)가 'girl' 시리즈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 시리즈의 제목만 몇 개 살펴보아도 <The Shop Girl>, <A Country Girl>, <The Circus Girl>, <My Girl> 등으로 한없이 이어지는데 미국에서도 이 것을 흉내내어 <The Casino Girl>, <Yankee Girl>, <The Wall Street Girl>, <The Charity Girl> 등이 다투어 선 보인다.
이 뮤지컬 코메디는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완전히 자리잡기 시작햇다. 물론 이 무렵까지도 뮤지컬 코메디의 선배격 형식들인 오페레타가 함께 성행해서 오스트리아의 리하르(Franz Lehar)의 비엔나풍 오페레타인 <The Merry Widow(1907)>가 큰 인기를 끌었으며 같은 해에 앞서 말한 Ziegfeld Follies를 포함한 여타의 장르들도 명맥을 이어갔지만 뮤지컬 코메디가 점차 확연한 우위를 전하기 시작했다. 1900년에 이미 30편 이상의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뮤지컬 코메디의 인기는 극본은 물론 작사, 작곡에 연출, 출연까지 겸했던 코한(George M. Cohan)의 등장으로 확립되었고 그 형식도 확고히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뮤지컬 코메디의 인기는 원작의 명성에 힘입은 극본의 호소력 보다는 스타급 출연진에 의존했고 줄거리는 상투적인 권선징악에다가 결말은 의례 행복한 결혼 따위의 해피엔딩으로 끝나기 마련이었다. 여기에는 비엔나에서 건너온 작곡가들 그 중에도 <The Student Prince(1924)>의 롬버그(Romberg)나 <Rose-Marie(1924)>의 프림(Friml)등의 낭만적 스타일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장기공연(long run)을 통한 막대한 수익을 목표로 삼는 뮤지컬 코메디에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은 것은 종전의 나이브한 낭만적 분위기에서 벗어나 생명력과 에너지에 넘친 음악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미국 출신 작곡가들의 등장이었다. <Show Boat(1927)>의 컨(Jerome Kern)과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Of Thee I Sing(1931)과 <Porge and Beth(1935)>의 거쉬(Goerge Gershwin) <Anything Goes(1934)>의 포터(Cole Porter), 그리고 <Annie Get Your Gun(1946)>의 벌린(Irving Berlin) 등이 그들이다. 이 중에서도 <Show Boat>는 음악 뿐 아니라 무거운 주제를 담은 줄거리와 그 줄거리를 바탕으로 한 극본의 중요성이 커지기 시작하여 미국 뮤지컬 연극의 발전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준 작품으로 꼽힌다.
특히 1930년대는 경제공황의 여파로 심각한 사회문제들이 야기되었으며 이 같은 시대상을 반영하여 뮤지컬 작품에도 이례적으로 심각한 소재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Johnny Johnson(1963)>은 반전 문제를 다루었고 <The Cradle Will Rock(1938)>은 노동문제를 다루기도 했다. 이 같은 심각한 뮤지컬의 등장과 함께 뮤지컬 코메디라는 용어의 사용에 저항감이 생겨났고 점차 뮤지컬 코메디라는 말 대신에 그냥 뮤지컬이라고 부르는 관행이 서서히 자리잡기 시작했다. 여기서 뮤지컬 코메디와 뮤지컬과의 의미상의 차이를 구분한다면 해피엔딩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뮤지컬 코메디라면 아무리 극본이 중요하고 흥미 있어도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작품을 말하며 그냥 뮤지컬이라고 하면 극본과 음악의 비중이 경중을 가릴 수 없을 만큼 대등한 작품을 말한다. 그러니까 뮤지컬 코메디는 다른 요소들이 아무리 뛰어나도 결국 음악을 즐기기 위한 종속적인 요소들이고 그냥 뮤지컬이라면 모든 요소들이 서로 대등하게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경우를 말한다. 그런데 뮤지컬의 형식이 완성되었다고 보는 것은 40년대부터 작곡자와 작사가로 공동작업을 해온 로저스(Richard Rodgers)와 해머스틴(Oscar Hammerstein)의 작품인 <Oklahoma(1943)>라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이 작품에 이르러서 비로서 뮤지컬에서 극본의 중요성이 확립되었는데 심각한 주제를 담은 스토리가 펼쳐지면서 음악은 자연스럽게 그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처럼 느껴지며 음악 자체가 극적 발전에 적극적으로 기여한다. 두 사람은 이 작품 외에도 <Carousel(1945)>, <South Pacific(1949)>, <The King and I(1951)>, <The Sound of Music91959)> 등의 작품을 잇달아 발표하여 미국을 뮤지컬의 종주국으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2차대전의 종식과 더불어 50년대에 접어들면서 뮤지컬연극도 정치, 사회 문제를 기피하고 낙관적인 기류를 회복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Guys and Dolls(1950)>와 퓰리처상을 수상한 <How to Succeed in Business Without Really Trying(1961)>의 극본과 작곡을 나눠 맡은 버러우스 (Abe Burrows)와 로서(Frank Loesser)이다. 그리고 같은 무렵에 버나드 쇼의 희곡<Pygmalion>을 각색한 러너(Alan Jay Lerner)와 로이(Frederick Loewe)의 공동작품<My Fair Lady(1956)>와 환상의 트리오라고 부를 수 있는 로렌(Arthur Laurents,극본),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 작곡), 손하임(Stephen Sondeim, 작사)이 셰익스피어의 <Romeo and Juliet>을 각색한 <West Side Story(1957)>가 공전의 대성공을 거두면서 고전, 명작의 각색붐이 일 게 되고 뮤지컬에서 극본의 중요성은 재확인되었다. 이로부터 뮤지컬의 극본은 정통연극(straight drama 혹은 spoken drama 또는 legitimate drama)과 대등한 위치에서 퓰리처상의 희곡부문에서 경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70년대에 접어들면서 미국 뮤지컬계에는 또 하나의 혜성과 같은 존재가 등장하는데, 제작자 겸 연출자인 프린스(Harold Prince)와 공동작업을 펼쳐온 그는 작사, 작곡가인 손하임이다. 두 사람은 퓰리처상을 거머쥔 <A Little Night Music(1973)>과 <Sunday in the Park with George(1984)>를 비롯하여 <Company(1970)>, <Pacific Overtures(1976)>, <Sweeny Todd(1979)> 등의 작품에서 소위 '컨셉 뮤지컬(Concept Musical)이라는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이들 작품은 종전의 뮤지컬과는 달리 사전에 완성된 극본이나 작곡이 없이 하나의 기본 아이디어 또는 컨셉만 가지고 각 분야의 참가자들이 모여서 처음부터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새로운 제작방식이다. 이의 영향을 받아서 극본이나 음악보다 현란한 춤을 위주로 한 안무가 중심의 뮤지컬도 등장하게 되는데 연출을 겸한 기라성 같은 안무가들, 포스(Bob Fosse), 베넷(Michael Bennet), 챔피언(Gower Champion)등이 <A Chorus Line>, <Dream Girl>, <Dancin'>, <42nd Street> 등의 작품을 통해 뮤지컬의 주역으로 부상한다.
그러나 80년대에 이르면 제작비의 엄청난 상승과 그로 인한 관람료의 인상으로 말미암아 뮤지컬의 제작은 크게 위축되며 위험부담도 크게 늘어나 제작을 오프나 오프-오프 브로드웨이로 진출하는 경향이 생겨난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미국 역사상 12년 연속 최장기 공연기록을 수립한<A Chorus Line>인데 오프 브로드웨이의 제작자인 팹(Joseph Papp)이 그 자신이 운영하는 Public Theatre에서 워크숍의 형태로 시작한 작품이다. 이렇게 미국의 뮤지컬이 전반적인 침체상태에 놓여있을 무렵 이번에는 영국의 뮤지컬이 미국으로 역수출되는 역류현상이 두드러지게 된다. 그 중에도 영국의 작곡가인 웨버(Andrew Lloyd Webber)의 작품<Cats>, <The Phantom of the Opera>와 프랑스 출신 작곡가인 쉔베르(Claude-Michel Schonberg)의 작품<Les Miserables>, <Miss Saigon>은 가위 미국 뮤지컬계를 석권하면서 미국이 세계연극의 발전에 기여한 유일한 분야라고 흔히 평가하는 뮤지컬의 분야에서마저 경제적, 예술적 양 측면에서 미국의 지위를 위협하고 있다.
 

 3,

 
지금까지 대중연극의 대표적인 세 개의 장르, 곧 멜로드라마와 코메디 그리고 뮤지컬에 대하여 간략하게 주로 그들 형태의 의미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는데 실상 대중연극의 장르라면 이들 말고도 셀 수 없이 많다. 마임, 인형극, 서커스, 마술, 곡예, 심지어 쇼에 이르기까지 관객을 앞에 놓고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모든 오락물은 대중연극의 장르에 포함시켜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영화, TV 등의 매스 미디어가 발달되면서 이 같은 군소 장르들은 대부분 매스 미디어에 흡수되어 버렸거나 아니면 소멸된 느낌이다.
이제 우리나라의 경우를 놓고 대중연극의 현황에 대하여 살펴보면서 이 장을 마치고자 한다. 위에 얘기한 세 개의 장르 가운데 멜로드라마와 코메디의 경우는 서양에서처럼 대부분, 영화, TV에 빼앗기고 연극무대에서는 거의 맥을 못추고 있다고 보인다. 우리나라가 서양연극을 받아들인 것은 1920년대 일제 식민치하에서였는데 그 무렵의 서양연극은 위에서 말했다시피 이미 순수연극과 대중연극으로 확연히 갈라져 있었고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연극예술을 서양으로부터 받아들인 주체는 지식인들이었으며 그들은 민족계몽 운동 내지는 문화운동의 차원에서 서양연극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당연히 서양의 순수연극쪽에 눈을 돌렸고 당시의 새로운 조류는 사실주의 연극이었기 때문에 거의 맹목적인 서구화(westernization) 내지 근대화(modernization)의 열기 속에서 서양의 연극을 올바로 이해하지도 못한 가운데 서양의 사실주의를 모방 답습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서양의 사실주의 연극은 겉모습만을 보자면 진지하고 심각하고 우울하고 금욕적이며 문예지상주의적이라고 여겨진다. 선민의식과 사명감을 가지고 이런 연극을 모방하는 데서 출발한 우리나라의 소위 신극은 대중연극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며 1930년대 동양극장을 중심으로 한동안 '신파'라는 이름의 대중연극이 장안의 인기를 모았을 때 이를 매도하기에 급급했다. 따라서 멜로드라마와 코메디는 우리 연극무대에서는 거의 빛을 보지 못했으며 영화와 TV에서 꽃을 피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대학로를 비롯한 연극가에서 멜로드라마나 코메디를 보기는 어렵다. 멜로드라마라면 처음부터 멜로드라마로 의도되고 쓰여진 작품이 아니라 순수연극을 의도했던 것이 의식수준의 낙후성으로 말미암아 결과적으로 멜로드라마 수준으로 추락한 멜로드라마가 더러 있을 뿐이며 코메디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기 어렵고 고작 뒷골목의 저질 코메디가 판치고 있을 뿐이다.
대중연극의 세 장르 가운데 가장 늦게 도입된 뮤지컬은 근년에 들어 무서운 기세로 확산되고 있다. 주로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수입하여 가공 생산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기는 하지만 국민 대중의 여가와 소득이 지금보다 더 향상되어 진다면 상업적 기반을 다지면서 제작술의 전반에 걸쳐 전문성이 제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보다 앞서 서양 뮤지컬을 도입해서 흥행적 성공을 거두고 있는 이웃 일본의 경우에서 보듯이 기술적 수준이 높아진다고 해서 반드시 양질의 창작 뮤지컬이 얼른 만들어 지는 것은 아니다. 기술수준의 축적 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의 투여가 요구되는 부분은 전문적인 뮤지컬 극본가와 작곡가의 양성이다. 국내에서는 그 동안 <명성황후>를 비롯해서 더러 창작 뮤지컬의 시도가 없지 않았으나 아직은 과욕에 그치고 있다고 보인다. 손색 없는 창작 뮤지컬이 자리잡힐 날이 언제일지 예단키는 어려워도 분명한 것은 뮤지컬은 이미 대중연극의 총아로서 확고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대중연극의 장르로 언급할 만한 또 다른 형태가 있다면 주로 방송사들이 앞장 서서 제작, 기획하여 공연되고 있는 마당놀이와 악극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주로 효도상품으로서 노년계층의 향수를 달래는 퇴행적 붐을 타고 있으나 지속적인 생명력을 가질 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또 하나 1960년대 대학가에서부터 반정부 민주화 투쟁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던 마당극이 있는데 80년대에 들어서 민족극으로 이름표를 갈아 달았으나 90년대 이후 한풀 꺾이기 시작했다. 이들 연극운동의 주체인 세칭 운동권 세력은 매스라는 뜻의 '대중' 이란 말 대신에 의식 있는 대중이란 뜻으로 '민중' 이란 말을 선호하면서 우리의 전통 연희형식을 접목한 새로운 극 형태를 만들어 이를 빌려 민중의 의식을 일깨우고 정치투쟁의 한 도구로 삼았으나 구 공산권의 몰락 등 전세계적인 탈 이데올로기 시대의 도래와 함께 열기가 가셨으며 특히 민주정부의 등장과 더불어 운동의 주체들이 제도권에 편입되면서 더욱 힘을 잃었다. 마당극이든 민족극이든 이들 대중연극을 표방한 형태는 처음부터 노동자, 서민계층의 자발적 욕구의 분출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운동의 주체인 엘리트 집단에 의해 떠먹여준 것이었던 만큼 애당초 자생력은 희박했다. 그리고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정치적 성격의 연극은 소멸되어가는 추세를 보이고 있는 것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앞에서 대중연극의 대표적인 장르로 멜로드라마와 코메디 그리고 뮤지컬 연극에 대하여 살펴보는 가운데 순수연극에 비하여 대중연극을 비하하면서 어느 면 부정적으로 바라본 것으로 자칫 오해했을 지 모른다.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은 그 것들이 나누어 질 때부터 서로를 질시하며 대립적, 적대적 관계를 형성해 왔다. 순수예술 쪽에서 먼저 대중예술을 공격하고 비난하기 시작했고 지식인 사회의 지지를 얻으며 이들의 논리가 힘을 받았으나 20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대중사회의 신장과 더불어 대중예술을 옹호하는 논리가 만만치 않게 등장했고 80년대 이후 소위 포스트 모더니즘의 기류속에서 아예 둘의 경계는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얼핏 순수예술은 뒷전으로 물러나고 대중예술에게 자리를 내준 양상을 띠며 대중예술 예찬론이 지배하는 느낌마저 갖게 한다.
그러나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의 우위를 논하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무익하고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둘은 각기의 의의와 특성과 효능을 지닌 것인 만큼 둘을 비교하여 어느 쪽이 우월하다는 일반론을 도출하는 일은 가능한 일도 아니라고 믿는다. 순수건 대중이건 '예술' 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한 예술은 공산품과 달라서 품질의 격차가 하늘과 땅 사이만큼 벌어진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순수예술이라 해서 다 좋은 것이 아니며 대중예술이라 해서 다 못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마도 곱게 보아서 순수예술이건 대중예술이건 적어도 절반 이상은(어쩌면 90%?) 쓰레기에 가까울 것이다. 우리가 예술에 대해서 말할 때는 우수한 품질의 것을 두고 말해야 하며 쓰레기는 애당초 논외로 돌려야 한다. 공산품의 품질을 논할 때에도 불합격품을 가지고 평하지는 않듯이 말이다.
연극평론가 벤틀리(Eric Bentley)는 멜로드라마야 말로 순수한 연극(serious란 뜻이 아니라 pure 하다는 의미로)이라고 말한 바 있다. 왜냐하면 순수연극은 관객에게 단지 연극을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연극을 통해서 인간에 대해 혹은 삶에 대해, 사회에 대해, 우주에 대해 말을 하고 싶어하며 따라서 연극은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으므로 오히려 불순한 연극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멜로드라마나 코메디와 뮤지컬 같은 대중연극은 연극을 통해서 무엇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연극을 즐겨 주기만을 바라기 때문에 순수하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순수연극 보다 대중연극을 만드는 일이 더 어려울 수 있다. 순수연극은 때로 솜씨가 서툴더라도 작가가 말하고 싶은 내용이 심중한 의의를 지닌다면 또는 새로운 미학적 시도가 엿보인다면 그 때문에 점수를 딸 수 있지만 대중연극은 도망 갈 수도 핑계를 댈 수도 없다. 관객이 재미 없다고 판정하면 그 것으로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러나 순수연극에 대해서는 관객이 함부로 의견을 말하지도 못하고 전문적인 평론가의 눈치도 살펴야 한다. 그래서 순수연극 쪽에서는 무능해도 눈치 보기를 잘해서 연명하는 예술가도 적지 않다. 대중연극은 오로지 관객과 정면승부를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심오한 주제니 새로운 시도니 하는 등의 변명으로 살아남을 길은 없으며 오직 직업적, 전문적 재능을 닦고 연마하고 현실에 밀착하여 대중의 욕구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할 것이다. 이 것이 대중연극의 매력이자 마력일 것이다.
 

 ◎ 위로 올라 갑니다.

 Minjung Theatre Company


 ◎ 처음으로   ◎  인사드림
 ◎ 극단소개   ◎  공연연보

 
대중연극, 알고 보기.(첫번째 페이지)
    
글 : 정진수

 
대중연극, 알고 보기.(두 번째 페이지)
     글 : 정진수

 ◎ 계간 공연예술 저널 창간 준비호
 ◎ 공연예술 저널 2001 - 1, 창간호
 ◎ 공연예술 저널 2001 - 2 호  
 ◎ 공연예술 저널 제 3 호(2002. 6)
 ◎ 공연예술 저널 제 4 호(2002년 11월)
 
  
□ 성균관대 공연 영상 문화 연구소 Home
 
  
◎ 전국의 극단, 극장, 연극기관 링크

 ◎ 남도의 영호남 연극제 행사일정

 ◎
세계 연극제 97 서울/경기

 ◎ 전국의 연극관련 대학 링크  
 
◎ 서울의 극단 연락처
 
 
정진수 작, 역, 연출작품명
 정진수 연극서적 안내

 
한국연극연출가협회 회원주소록
 
 ◎ 알림판
 ◎ 자유 게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