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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연극제.]1977년 제 1회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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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3 회 서울 연극제(1989년부터 "대한민국 연극제"에서 "서울 연극제"로 명칭이 바뀌다.)
칠산리
이강백 작 / 정진수 연출

 주최 / 한국연극협회
 후원 / 한국문화예술진흥원 . 문화공보부
 1989. 8. 27 ~ 9. 7 [오후 4 : 30 / 7 : 30]
 문예회관 소극장

  작가의 말
[칠산리] 공연에 덧붙이는 생각들
  
이강백

  칠산리는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든지 흔히 듣는 마을 이름이다. 그와 유사한 이름으로서는 구산리라든가, 오산리 또는 삼산리 등이 있다. 모두 산과 관계된 마을 이름들이다. 그러므로 [칠산리]는 우리나라 아무 곳에서나 산이 있는 곳이라면 그 어디에서든지 일어났던 일과 연관 짓기를 바라는 의도가 담겨져 있다.
산과 관계된 일이라고 하면 무엇인가? 육이오를 체험한 세대는 금방 산속에서 무장투쟁을 했던 빨치산들을 떠올릴 것이다. 사실, 험한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마을에 가면 육이오 난리 때 빨치산에 관한 이야기를 흔히 듣게 된다. 빨치산은 밤이면 마을에 내려와 살인을 하고, 가축을 잡아가며, 양식을 약탈해 가는 흉악한 집단으로 묘사된다. 그런가 하면 그들은 사회적 모순에 심한 거부감을 느끼고, 부자도 빈자도 없이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목숨을 내놓은, 다시 말해서 꿈과 같은 이상에 현혹된 감상주의자들로 평가되기도 한다.
육이오를 체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들에게도 빨치산은 커다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태의 [남부군] 이영식의 [빨치산] 같은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한 수기들이 출판되자 폭발적인 베스트 셀러가 되는가 하면, 한국 현대사를 조명하는 세미나라든가 토론회에 빨치산은 중요한 테마로 자리 잡는다.
소설, 시, 희곡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다. 그 예로서, 사실주의 희곡으로서 정상에 꼽히는 차범석의 [산불]을 들 수 있다. 빨치산에 가담했다가 마을로 숨어 들어온 남자가 중요한 등장인물이다.
그러나 [칠산리]는 빨치산과 직접 관계되어 있지는 않다. 빨치산 보다는 그 다음 세대에 대해서 관심이 물러나 있다. 즉, 그들의 자식들에 대해 관심을 더 두고 있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김병익은 [분단의식의 문학적 전개]라는 글에서 소위 빨치산의 자식들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그들은 북의 사람들이 버렸기 때문에 남의 서자이다. 그들은 그러므로 지고 있는 셈인데 이 비운을 뒤집어, 그리고 우리의 전망을 열어놓고 생각한다면 그들이야말로 분열된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떳떳한 적자가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남과 북 양쪽으로부터 양육과 혈통을 받았고, 분단의 경계에 서서 두 다리를 걸고 있기 때문이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혹은 화해의 소망이든 상잔의 유산이든 간에 그들을 민족적 정통성의 새로운 인자로서 심장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렇다. [칠산리]의 등장인물들은 양쪽에 두 다리를 걸고 있는 빨갱이의 자식들이다. 하지만 그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들의 기억속에는, 버려진 그들을 자식으로 받아들인 어머니가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옳고 그름을 분명히 가르려는 준엄한 아버지 보다는, 피 흘리고 버려진 자식들을 얼싸안고 그 상처를 싸매주는 어머니가 이 세상엔 더 필요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든지 흔히 일어났던 사건으로부터 출발해서, 빨치산에 대한 관심이 생겼고, 그들의 자식들에게 관심의 초점을 옮겼다가, 결국은 그 자식들을 품안에 거둬들인 어머니에게 귀착된 것이 [칠산리]이다. 이러한 과정을 살펴 볼 때, 다시 한 번 확인되는 것은 모성애의 절실한 필요성이다. 우리의 분열된 역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어머니의 눈이어야 한다. 새로운 인자로서 심장한 의미를 갖고 있는 "빨갱이의 자식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뒤집어서 그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머니와 같지 않으면 안된다.
지금은 날카롭게 꾸짖는 소리만이 드높은 시대이다. 고통에 사로잡혀 울부짖는 소리들, 학대의 쾌감으로 목청 높은 소리들, 원한에 사무쳐 복수의 칼을 들고 심판을 요구하는 소리들만이 판을 치는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는 "이 것(나)은 옳고 저 것(너)은 그르다." 는 흑백논리가 지배한다. 그리고 이러한 흑백논리 때문에 이 세상의 난리는 끝나지 않는다.

연극 [칠산리]를 본 관객들에게, 나의 의도가 그대로 전달 되어야 한다는 조바심은 없다. 연출을 맡은 정진수는 [칠산리]를 한 번 읽어본 다음 이렇게 말하였다. "이 희곡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보다는 정조를 전달하는데 중점을 둬야겠다."
나는 그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의 높은 목소리를 내는 연극 보다는, 그저 어떤 느낌이 있는 연극을 연출가 정진수는 만들어 줄 것이다.
금년 여름은 지독하게 무덥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10월(연극제 마지막 날) 쯤에 공연될 수 있었다면 [칠산리]의 배경이 되는 첫눈 내리는 계절적 정취가 어느 정도는 느껴질 수 있을 텐데, 더위가 식지 않은 8월 말에 공연되는 것이 조금은 염려스럽다.
어찌 되었든, 불볕 더위속에서 열정을 쏟은 <민중극단>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연출의 말
"통일열기"
정진수

  최근에 들어 갑자기 통일논의가 가열되고 있다. 통일의 전망이 눈앞에 다가선 것도 아닌데 그 열기만 끓어오르고 있다. 최근에 불어닥친 민주화의 한 부산물로 보여진다. 과거의 권위주의체제가 붕괴되면서 각종 금기들이 깨뜨려지기 시작하자 이데올로기의 경직성도 상당부분 허물어진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신데탕트라는 세계정세의 흐름도 한몫 거들었을 것이고 국민의 관심을 대외로 분산시키기 위한 우리 정부의 성급한 '7. 7선언'도 부축임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어쩌자는 것인가? 평범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결코 통일을 반대하지는 않는다. 아니, 열열한 통일지지자라고 자처한다. 그러나 나는 결코 통일지상주의자도 아니요 통일 숭배자도 아니다. 난 통일이 우리의 목적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통일이 되면 좋은 일이고 설혹 안된다 하더라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통일이란 그 것이 우리 구성원 공동의 이익에 부합할 때에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라에 따라서는 통일이 아니라 분리를 요구하는 곳도 있다. 통일이든 분리든 그 것이 구성원 대다수의 이익에 합하느냐 아니면 반하느냐에 달린 선택의 문제이고 수단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또 다시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국가란 정치체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한 민족이 단일민족이라고 해서 반드시 한 나라, 하나의 정치체제로 묶여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국경을 긋고 서로 사이 좋게 지내면 왜 안되는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나는 통일 보다는 남북간의 적대관계를 청산하는 것이 더 시급하고도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나서 평화공존관계를 구축한 연후에 자연스럽게 통일의 길을 모색해서는 왜 안되는 걸까? 한 민족은 반드시 하나의 나라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것은, 그렇다면 타 민족과는 적대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까? 세계는 어차피 좁아지고 있다. 우리가 통일을 말하려면 세계의 모든 인류가 서로 사이 좋게 살아야 한다는 보다 큰 목적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본다.
어떠한 방식의 통일도 선이라 믿는 극단적인 통일지상주의자들은 순진하고 감상적인 이상주의자들일 수 있다. 아니면 이상주의자의 가면을 쓰고 다른 진짜 순진하고 감상적인 사람들을 현혹하려드는 위선자일 지도 모른다. 통일이라는, 아무도 반대하기 어려운 구실을 내걸고 속셈으로는 계급투쟁과 체제전복을 노리는 음험한 음모자일 지도 모른다. 어떠한 방식의 통일도 선이라고 했을 때 논리적으로는 남한방식의 통일도 배제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을 말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방식의 통일'이 곧 적화통일을 뜻함을 은연중 암시하는 경우가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남한의 체제를 포기하면 당장 통일이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쪽의 체제를 전면 포기해야 할 만큼 통일이 그토록 '급박한' 민족의 염원일까?

민족의 통일이 어찌 인간 개인의 삶의 목적이 될 수 있는가?통일을 해서 나라가 더욱 부강해 지고 모든 국민이 더욱 자유와 복지를 누릴 수 있다는 전제하에 나는 통일을 갈망하며, 깊이 생각해 보지는 않았으나 내 생각에 통일이 그와 같은 일을 가능하게 해주리라고 믿어서 나는 통일을 갈망한다. 그러나 내 개인의 삶을 돌아보더라도 그 좋은 일이 어느 날 갑자기 '만나'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리라는 환상적인 기대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런 뜻에서 이번 연극 [칠산리]는 편견과 이념의 벽을 허물고 어머니의 품속같은 사랑속에서 우리 모두가 화합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소박하면서도 절실한 구원의 메시지가 되어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칠산리]는 얼핏 어머니같이 넓은 사랑으로 우리 모두가 화합을 이루자는 대단히 나이브한 주제를 전달하는 작품으로 보일 수 있으나 실상 그 것은 이 연극의 "과거" 장면만을 떼어놓고 보았을 경우이다. [칠산리]는 이강백씨의 다른 작품들처럼 중층 구조를 가지고 있다. "과거" 장면과 병행하여 전개되는 "현재"의 장면에서 우리는 "과거" 장면과의 대비를 통하여 작품 전체의 주제와 맞닥드린다.
어머니의 분묘를 이장해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일곱명의 자식들이 황망히 모여든다. 그러나 그들은 어찌해야 할 지 모른다. 도로신설 때문에 이장을 할 수밖에 없다는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사실은 자기네들을 칠산리에서 추방하기 위한 또 다른 목적도 있음을 간파한다. 억울하고 분하게 느껴지지만 당장 대처할 방법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나머지 자식들이 모일 때까지, 공고 마감시간까지 기다려 보겠노라고 버틸 뿐이다.
그러나 면장은 이들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불안하다. 더구나 형사들을 만나고 또 막내가 나타났다는 정보를 듣고서는 더욱 불안감이 가중되어 자식들이 분명 대단히 위험한 사전계획을 가지고 몰려든 것으로 단정한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을 자극하던 막내가 어처구니 없이 고본고분하게 형사들에게 체포되어 갔다는 소식을 듣고 면장과 자식들은 함께 안도와 허탈에 빠진다.
지금 우리 사회에 만연된 과잉 피해의식, 과잉 방어의식을 [칠산리]는 꼬집고 있는 것이다. 이 것은 "과거" 장면에 있어서도 이 쪽과 저 쪽이라는 이분법 사고의 경직성을 허물고 있는 데서 맥을 같이한다. 곧 이 쪽은 선이고 저 쪽은 악이라는 도식이 깨뜨려져 있으며 어미라는 중립적 인물의 역할이 부각되어 있으며 어미의 맹목적 모성에 의해 감싸지는 데서 이 같은 주제는 명료하게 드러나 진다.

 
작곡자의 말
이성환
 

  칠산리 대본을 읽어보며 대사와 극의 전개에 음악적인 요소가 상당히 많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를 중심으로 하는 과거와 자식들을 중심으로 하는 현재가 한 무대 공간에서 교차하는 구성과 그 대사들의 리드미컬한 흐름이 그러했다.
이 작품의 음악들은 거의가 자식들이 과거 어머니를 그리며 부르는 것으로 그 노랫말의 강렬함 때문에 배경음악을 작곡하기에 여간 조심스럽지가 않았다. 그래서 음악적인 기교 보다는 전체적인 앙상블을 염두에 두고 일을 하였다. 그런 점에서 이번 작품 [칠산리]에서는 되도록 복잡한 리듬을 피하고 여섯곡의 머릿부분을 거의 같이 흐름이 비슷하게 하였다.
더욱이 이 작품에서 전해지는 서정적이면서도 원시적인 분위기를 표현하기 위해 고심했으나 지나치게 토속적이고 전통적인 음악으로 치우치는 것에서는 탈피하고자 했다.
한 작품을 완성하기 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을 충실히 메우기란 그리 수월한 것만도 아니다. 그러나 민중극단 단원들과의 작업은 언제나 즐겁고 더욱이 이번 [칠산리] 같이 좋은 창작극을 공연함에 같이 함여할 수 있음은 기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작품을 위해 수고하신 여러분들과 같이 좋은 연극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 이성환씨는 <민중극단>에서 지난 5년간 음악부문에서 지속적으로 참여했다.
청소년 뮤지컬 [바람처럼 강물처럼]을 작곡했고 영어뮤지컬 [춘향전] [아파트의 열쇠를 빌려 드립니다.]의 편곡과 [하이디], [올리버], [피터팬] 등의 어린이 뮤지컬의 편곡을 맡았다.
 


 
"서울연극제"에 거는 기대
 

  "서울 연극제" 가 올해로 13회를 맞는다. 실상 13이라는 숫자에는 별 의미가 없다. 그러나 올해의 "서울 연극제"는 어느 때 보다 기대를 모은다. 첫째, 그동안 연극가에 나도는 풍문에 의하면 이번에 희곡심사사를 통과해서 연극제에 참가하게 된 작품들에 대한 일반적인 평이 매우 좋다. 그 중 서 너 편은 빼어난 수작들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그 가운데서도 두 편은 신인 극작가의 작품이라서 더욱 기대를 모으게 한다. 예년의 연극제의 경우에는 쓸 만한 희곡이 고작 한 두 편 있을까 말까였고 더구나 우리 연극사에 남을 만한 희곡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음을 상기할 때 기대는 한 껏 높아진다.
연극제라는 것이 창작극 진흥을 목적으로 만들어 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다할 희곡이 연극제를 통해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 과거 연극제의 아이러니칼한 맹점이었다. 그래서 연극제 참가작은 1회용, 잔치용으로 소모품화 되어 버려서 서울의 기성극단들이 재공연을 가진 예는 거의 없을 정도였다. 따라서 올해의 연극제에 우수작 풍년이 들었다는 풍문이 사실이라면 올해의 연극제는 획기적인 연극제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
두번째,
올해의 연극제에 각별한 기대가 모아 지는 것은 이번 연극제가 명실상부하게 <한국연극협회>의 주최로 베풀어 진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관제' 연극제라는 소리를 들어왔고 그래서 연극제의 민간자율화의 요구가 빗발쳤으나 <아시안 게임>과 <서울 올림픽>에 발목이 잡혀서 미루어 졌었는데 올해부터 연극제의 주최권은 연극계의 유일한 협의체인 <한국연극협회>로 정식 이관된 것이다. 더구나 <한국연극협회>는 연초에 임원이 개선되어 새 집행부가 의욕적인 출범을 했기 대문에 연극인의 손으로 넘어온 이 연극제를 과연 얼마나 충실하게 치루어 낼 수 있을 것인지 자못 기대가 크다. 자칫 연극제를 넘겨달라고 아우성쳐 놓고 막상 넘겨받은 연극제를 예년 보다도 엉성하게 치루어 낸다면 관제행사라고 매도해왔던 우리들의 낯이 부끄러울 것이다.
이 같이 두 가지 측면에서 크게 기대되는 연극제에 참가할 수 있게 된 것을 보람있게 생각하면서 우리 <민중극단>은 그동안 누적되어온 연극제와 관련한 문제점을 이 기회를 빌려 제기하고자 한다. 가장 큰 문제 하나만 지적하자면 연극제의 근본 성격에 관한 것이다. 연극제의 큰 의미가 위에서도 지적했듯이 창작극 진흥에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애당초 연극제가 탄상할 때의 기본취지는 영세한 민간극단에 대한 지원사업으로 입안되었다는 것이다. 창작희곡의 발굴이 유일한 목적이었다면 극단을 통한 공연지원의 성격을 띌 것이 아니라 문예지 발표를 통한 원고료 지원이 훨씬 간편하고도 효율적인 것이었을 거다. 그러나 연극예술의 특성을 고려하여 무대 발표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함은 물론이고 이 것을 극단지원과 연계한 것이 연극제의 발상이었다. 그러니까 백 보를 양보하더라도 극단에 대한 지원은 연극제의 하나의 목표인 것은 부인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연극제는 과연 극단지원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어느만큼 실효성 있게 달성해 냈던가? 여기에 대한 연극인들의 평가는 부정적이다. 올해 연극제 참가 공연에 대한 지원을 예로 들어보자.
대관료를 포함한 <한국 문화예술진흥원>의 1 개 공연에 대한 지원 액수는 1천만원이 안된다. 여기서 작가에 대한 원고료 250만원과 대관료를 제외하면 한 극단의 실 수령액은 580만원이다. 그러면 평균적인 극단의 경우를 상정하여 수지 예산을 따져보기로 하자. 어림잡아 지출예상액수를 큰 항목별로 따져본다면 인쇄비 300만원, 무대제작비(소품포함)250만원, 연습과 공연경비 150만원, 사무 통신비 30만원, 예비비 50만원, 출연자사례(경력배우 10명기준) 300만원 정도인데 총 지출 예상액 1320만원이 된다.
이 예산은 누가 보아도 줄여잡은 것이라고 할 것이다. 민중극단의 예는 욕심을 내느라고 음악비(작곡과 음악)에 200만원의 예산을 추가 지출했다. 이 같은 사정이 타 극단이라고 없을 리 없으므로 대략 총 예산이 1500만원이 드는 셈이다. 여기서 지원금 수령액 580만원을 빼면 이미 920만원의 결손이 생긴다. 이 결손액이 가뜩이나 침체인데다가 관객 안들기로 정평이 나있는 연극제 참가공연을 통해서 어느만큼 메꾸어 질 수 있을 것인가?
과거의 예를 기준으로 삼았을 때 대극장 6일간 12회 공연을 통해서 잘해야 400여 만원 정도가 예상된다. 이 것은 결국 연극제 참가로 인해 각 극단이 500만원 내외의 적자를 감수해야 한다고 했을 때 한가지 자명한 결론은 연극제가 결단코 극단에 대한 지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극단들의 처지는 낚시에 걸린 물고기의 신세와도 같다. 지원을 받는다는 미끼에 걸려 지원은커녕 적자로 피해를 입게 되는 셈이다.
더구나 올해의 연극제는 명실공히 <한국연극협회> 주최이기 때문에 지원금을 내주는 창구의 역할로 물러앉은 <한국문화예술 진흥원>에 대고 푸념을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다. 진흥원으로서는 오히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연극제를 마음대로 잘 해보라." 고 먼 발치에서 뒷짐 지고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우리 연극인들에게 있다. 진흥원에서 내주는 알량한 예산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타성에 젖어 안일하게 종전처럼 연극제를 운영한다면 화를 자초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민중극단이 이번 연극제의 첫 막을 올리면서 이미 그러한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 있다. 광고 스폰서 하나도 없는 이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이미 실감했지만 주최측은 "뽑아주었으니 고맙게 생각하고 알아서 하라."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번 연극제의 운영위원들은 자기네들이 연극제 운영위원이라는 사실조차 거의 의식하지 못한 가운데 종전의 관제연극제처럼 권위주의적이고 시혜적인 자세에서 희곡심사와 공연심사만 하고 심사비만 받으면 족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예술적 성과는 각 극단의 책임이다. 그러나 연극제를 성공적으로 치루어 내는 일은 참가극단 못지 않게 주최자에게 더 큰 책임이 있는 것이다. 모처럼 우리 연극인들의 손에 맡겨진 이 연극제가 축소지향의 연극제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외람되나마 연극제의 첫 막을 조심스럽게 연다.

  
"연극 착취하는 문예진흥기금"
 

  연극공연장을 포함하여 각종 공연장, 영화관, 고궁들을 입장할 때 입장객들은 입장료의 8.5%에 해당하는 <문예진흥기금>을 낸다. 이렇게 해서 모인 돈은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예산에 포함되어 문화예술분야에 대한 지원금으로 쓰이게 된다. 이렇게 겉으로 보았을 때는 문예진흥기금은 예술인들에게 도움을 주는 좋은 제도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속사정은 판이하다. 문예진흥기금 제도는 예술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도 않으며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예술인을 착취하는 제도인 것이다. 이런 엄청난 모순이 어떻게 빚어지는가? 이제 속사정을 살펴보자. 먼저 진흥기금이 예술인을 착취하는 연극분야를 살펴보자. 먼저, 진흥기금이 예술인을 착취하는 측면을 연극분야를 예로 들어 보겠다. 애당초 진흥기금 모금제도가 시작되었을 당시의 기금은 정액제(1인당 100원씩)로서 별도 징수하였다. 다시 말해서 연극관람을 온 관객은 매표구에서 표를 사가지고 입장할 때 별도로 100원을 더 냈었다. 그까짓 100원 때문에 되돌아가는 관객이 없었고 극단이 징수를 대행할 망정 바로 그 자리에서 징수된 기금을 인수해갔기 때문에 극단측의 부담은 거의 없었다. 극단은 이 돈이 언젠가 우리를 지원하는 데 쓰일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오히려 기뻐했다.
그런데 몇 년 뒤 사정이 바뀌었다. 당국이 문예진흥기금을 인상하기 위한 편법으로 100원 정액제를 폐지하고 그 대신 일률적으로 8.5%라는 비율제를 채택했기 때문이다. 티켓의 종류(가령, 현매, 예매, 관극회원권, 할인권 등)에 따라 입장료가 다른 데다가 8.5%라는 비율은 얼핏 암산으로 쉽게 계산되지 않는다. 가령 관람료 3.500원에 대한 8.5%라면 관객이 추가로 내야 할 돈은 297원 50전이 되는데 계산도 복잡하지만 관객이 무슨 수로 입장할 때 이런 잔돈을 준비했다가 낼 수 있겠는가. 아마도 이 돈을 일일이 별도로 징수하려다가는 공연이 다 끝날 시간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 때부터 진흥기금은 슬그머니 관람료에 포함되었다.
따라서 연극티켓마다 "진흥기금포함"이라는 글씨가 인쇄되기 시작했지만 자신이 진흥기금을 내고 있다는 의식을 가진 관람객은 없다. 다시 말해서 그 때로부터 진흥기금은 관람객이 내는 게 아니라 사실상 공연단체인 극단이 내게 된 것이다. 더구나 공연이 끝난 뒤에 총 수입금의 8.5%를 추후 당국에 납부해야 하는데 적자공연의 경우는 입장수입을 이미 화급한 용도로 지출한 뒤이기 때문에 극단이 빚을 내서 갚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령 현재 민중극단의 진흥기금 부채는 1천만원이 가까운데 이 것은 민중이 태만했기 때문이 아니라 가장 공연활동이 활발했다는 반증이 된다. 다시 말해서 한 번도 공연하지 않은 극단은 진흥기금 부채가 있을 리 없다. 결론적으로 민중극단 같은 경우는 연극활동 열심히 해서 진흥기금 부채만 쌓인 셈이다. 그동안 민중극단이 공연활동을 통해 낸 기금만 해도 기천만원 실히 될 것이다. 이 금액은 이론상으로는 관객이 낸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진흥원 당무자도 공개 세미나 석상에서 솔직히 시인했듯이 극단이 낸 것이라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극단으로서는 왜 이같은 부당한 제도를 감수했던가? 우선 연극인이 세상사에 그만큼 약삭바르지 못하기 때문에 술수에 넘어 간 것이다. 100원 정액제에서 비율제로 바뀔 무렵 연극입장료는 2,000원이었다. 입장료를 올려야만 할 시점에 있었다. 그런데 단번에 3,000원으로 요금을 인상하자니 아무래도 과다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3,000원으로 요금을 인상하는 대신 별 것 아닌(?) 진흥기금을 그 안에 포함시키므로서 관객에게 미안함을 조금은 덜 수 있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한 것이다. 그 뒤로 관람권에 "진흥기금포함"이라는 문구가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당국의 간교함은 이내 드러났다. 비율제로 바뀌었을 때 8.5%라는 비율은 변함없으나 연극인들이 물가변동에 맞추어 입장료를 인상할 때마다 진흥기금은 소리 소문 없이 자동적으로 인상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진흥기금이 올라도 관객은 아랑곳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입장료에 기금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관객들은 어차피 자기네가 진흥기금을 내고 있다는 사실마저 까맣게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금년초에 진흥원은 기금 비율을 8.5%에서 7%로 슬그머니 인하해 버렸다. 작년부터 주로 영화계에서 진흥기금에 대한 반발이 거세게 일어나자 한 때는 한시법으로 되어 잇는 진흥기금법을 폐지해서 기금모금을 중단한다는 방침을 세웠었다. 그러더니 금년에 들어서 모금을 계속한다는 쪽으로 다시 방침을 선회했다. (하기야 스스로 한다던 중간평가도 안한다고 하고 5공 청산은 회귀쪽으로 돌아가는 현 정부로서야 무슨 짓인들 못하랴만) 이렇게 스스로 생각해도 낯 뜨거울 정도로 우왕좌왕하던 당국이 기금 모금을 강행하면서 슬그머니 기금비율을 지난 3월 1일 자로 8.5%에서 7%로 낮추었다. 두꺼비도 얼굴이 있었는지 아니면 비율 인하로 비위를 맞출 속셈이었던지 비율을 내리긴 했는데 막상 이론적으로 진흥기금 납부 당사자인 일반 관객들에게는 홍보조차 하지 않았다.
<연극협회>의 사무국장도 8월초 까지도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진흥원 담당자의 말에 의하면 비율인하를 알리는 공문을 각 공연장에 발송했고 관보에 게재했을 뿐 신문지상에 공고 한 장 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관객이 내는 돈을 관객이 모르게 올렸다 내렸다 하는 속셈은 무엇일까? 지극히 간단하다. 진흥원 당국도 사실은 진흥기금을 내는 것은 관객이 아니라 극단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캐스트

      스탭

양금석 / 어미
강애심 / 간난이
윤주상 / 면장
이윤미 / 할머니
정운봉 / 장남
김형영 / 차남
한필수 / 삼남
조재현 / 사남
 


최은미 / 장녀
박선옥 / 차녀
박근숙 / 삼녀
이창훈 / 늙은 형사, 이장, 병사1
신종주 / 젊은 형사, 특무상사, 병사2
이하영 / 다복네
민영준 / 뒷골네
김남일 / 움집네
 


김효선 / 무대미술
이성환 / 작곡
배혜령 / 동작구성
김기진 / 분장
박종찬 / 조명
한동근 / 음향
강   희 / 무대감독

  영세극단 착취하는
  문예진흥기금 철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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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njung Theatre Compan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