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njung Theatre Company

 ▒ 처제의 사생활 ▒

 앨런 애크번 작 / 이문원 역, 연출 / 최연호 미술
[원제 : Norman Conquests 제 1 부 / Table Manners]
[작가 : Alan Ayckbourn]

 1989. 7. 28 ~ 8. 27 [오후 4 : 30 / 7 : 30]
샘터파랑새 극장

 작품해설
"처제의 사생활"
(원제 " 정복자 노만 제 1 부 / The Norman Conquests)

 
현재까지로는 가장 복잡하게 구성된 애크번(Ayckbourn)의 작품 "정복자 노만"(
The Norman Conquests)이 런던에서 히트를 했을 때 (이 작품은 1973년 6월 스카버러 도서관 극장[Scarborough Library Theatre]에서 초연되었고, 1974년 5월에는 그리니치 극장 [Greenwich Theatre]에서, 이후 1974년 8월에는 글로브[Glove]로 옮겨져 공연되었다.) 사람들은 주위에 코웃음을 치는 분위기가 있음을 알기 시작했다. 이는 말하자면 이제 이 작가가 자기 자릴 제대로 찾아들어갈 수 있는 때가 되었구나 하는 분위기였다. 이는 물론 인기와 성공을 참고 보지 못하는 영국 지식층의 한 특징이었다. 이 "성공과 인기" 는 한 작가나 화가, 작곡가나 혹은 연기인을 지배적인 엘리트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대중에게로 넘기는 것이었다. 다수가 즐기는 것은 자동적으로 이류가 되었다(풍속소설[genre fiction]에 대한 문학편집자들의 모욕적인 대우나, Royal Academy Summer Show에 대해 미술 비평가들이 관례적인 비방을 하는 것, 혹은 Peter Shaffer 같은 극작가들에 대한 적극적인 적대감을 눈여겨 보라.)
1974년 이 삼부작을 글로브의 무대위에 올렸고, Crition과 Vauceville에서 Absurd Person Singular를 공연한 Ayckbourn은 이제 이런 취급을 받을 자질을 갖추기 시작한 셈이었다.
미리 말하지만 이런 작업이 극비평가에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정복자 노만"에 '실패'라는 호칭을 붙인 Telegraph지의 Frank Marcus를 예외로 하고, 악의 가득한 신문의 비평가들은 모두 이 작품의 요점을 간파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애크번이 과잉판매되었다는 느낌을 다른 곳으로부터 알아내기 시작했다. 그와 같은 반응의 하나를 나는 Guardian지에서 말한 적이 있다. '어느 날 내가 영화비평가인 한 친구와 점심을 함께 할 때 화제가 Alan Ayckbourn에게 옮겨갔다. 그 때 이 친구가 말했다. "자네 극비평가들 말이야. Ayckbourn에 대해 그렇게 멍청하게 굴지들 말게. 그는 그냥 괜찮은 가벼운 희극작가야. 그런데도 자네나 Lambert, Nightingale은 마치 그가 일종의 사회 정치적분석가인 것처럼 말한단 말이지. 내가 Absurd Person Singula를 봤을 때는 그 작품이 평균적인 Carry On 영화만큼 인생에 대해 얘기하는구나 생각했어. 솔직히 말해서 만일 극장이 제공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이 이런 것이라면, 극장은 지금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좋지 않은 상태에 있는 거야."
그런 비난에 대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한 가지 방법은 이 극작품, 즉 세 편의 극(Table Manners, Living Together, Round and Round the Garden)으로 구성되어 있고, 식당과 거실과 정원이라는 서로 다른 장소를 관찰점으로 잡고 있으며, 한 빅토리아식 전원주택에 사는 정신착란적인 가족의 주말을 토요일 오후 다섯시 반부터 월요일 오전 아홉시까지 그려낸 이 "정복자 노만"을 보는 일이다.각각의 극은 독립적으로도 완성된 것이지만, 세 편을 함께 엮고서야 그 주말에 일어난 일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고, 극중 인물들 모두가 얼마나 병들어 있으며 무망하게 살고 있는가를 파악할 수 있다. 또한 근시의 여실업가인 루스와 결혼하고서도, 처제인 애니(Annie)와 이스트 그린스테드에서의 불결한 주말을 제안하고, 또 다시 처남의 부인인 사라(Sarah)를 향해 육식동물과 같은 접근을 하는 노만(Norman), 이 방탕한 사내의 진정한 속성을 알 수 있는 것도 세 편의 작품을 다 읽고나서이다.
물론 이 삼부작에 대해 느끼는 강렬한 인상은 우선은 그 기법상의 재간이다. 애크번은 Absurd Person Singular 의 무대밖의 액션을 How The Half Love에서 전개되는 복잡한 시간감각과 결합시키므로서, 이들 작품이 다른 것들과 다르다는 느낌을 우리에게 준다. '저는 우선 이 삼부작의 셋째 편인 [정원을 돌고 돌아(원제 : Round and Round the Garden)]의 제 1 장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에 나머지 두 편의 각 1장으로 옮겨갔죠. 각각의 2 장도 그런 식으로 써나갔습니다.' 극을 이렇게 좌우로 가로지르며 썼지만, 그는 극을 위 아래로 볼 때 또 한 독특한 특징이 보이게 했다. 유명한 디너 파티 장면이 나오는 [처제의 사생활(원제 : Table Manners)]에서, 그 광란의 광경은 영(B.A.Young)이 말했듯이 '거의 연속적인 웃음의 필수반주'를 일으킨다. [더불어 살아가기(원제 : Living Together)]는 좀 늘어지는 면이 있지만, 여기서 가족관계가 보다 세밀히 추적된다. 관례적인 양상이 보이고 법석이 덜한 [정원을 돌고 돌아]에서 마침내는 이 장거리 이기주의자들의 외로움이 드러난다.
이 삼부작의 기법적인 면을 자세히 늘어놓기 보다는 (이는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므로) 간단히 몇 가지 예로 그치는 게 낫겠다. 시간과 시간을 끼워 맞추는 애크번의 솜씨는 특히 인상적이다. 예를 들어 시간상의 순서는 애니를 이스트 그린스테드로 나꿔채가기 위해 노만이 이 빅토리아 풍의 낡은 집에 예고 없이 도착하는 토요일 오후 5시 30분, [정원을 돌고 돌아]의 제 1 장에서 시작된다. 그 다음 장면은 같은 날 오후 6시, [처제의 사샐활]에서 식당을 배경으로 벌어진다. 여기서 남편 레그(Reg)와 함께 시어머니를 돌보면서 주말을 보내려고 내려온 사라는, 애니가 노만과 함께 음란한 주말을 보내려고 외출중이라는 것을 알 게 된다. 다른 극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이런 상황의 설정은 그 자체로 충분한 분규(complication)가 된다. 그러나 애크번은 [정원을 돌고 돌아]에서 (시간은 오후 6시 25분 경이다.), 노만에게 애니가 결국은 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 위해 사라가 의기양양하게 그 정원에 도착하는 것으로 그 첫장을 끝낸다. 그래서 그 장면들은 일시적으로 겹치게 된다. 한 장면에서 얻어진 정보는 그 보다 앞선 사건의 극적 발전에 영향을 주기 위해 쓰이지만, 그 것 뿐만은 아니다. 애크번은 오후 6시 30분에 거실에서 시작되는 그 다음 극 [더불어 살아가기]의 제 1 장을 계속 몰아가기 위해 노만에게 적절한 절망을 준다.
애크번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솜씨가 있다.
'저는 일련의 선결조건, 특히 제가 전반적인 통제권을 갖고 있는 그런 조건하에서 작업을 할 때 일이 잘 됩니다.' 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그의 기법적인 재간자체에만 감탄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이를 어떻게 어디에 집어넣어 쓰느냐, 이다. 애크번은 여기서 성격과 웃음을 드러내기 위해 (이 둘은 전적으로 동반관계이다.) 동시에 일어나는 무대밖 액션(simultaneous off - stage action)이라는 아이디어를 사용한다. 그래서 [처제의 사생활] 제 1 장에서는 병적인 긴박감을 느끼는 사라가, 노만과 애니가 거실에서 무얼 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고분고분한 그녀의 남편 레그를 급파한다. 그 결과로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기]의 제 1 장에서, 휴지통을 찾는다는 핑계로 노만과 애니의 밀회에 침입하는 레그를 보게 된다. 이 희극적 상황은 간단하지만 극적인 재미가 있다. 더욱 괜찮은 것은 이런 상황이 빈번한 간섭을 하는 사라의 질투와 쉽게 속아넘어가는 레그의 순응성에 대해 많은 것을 얘기해 준다는 것이다.
이런 예들은 더 있다. 그러나 정작 지적해 두고 싶은 것은 이들 작품이 개별적으로도 즐길만하지만, 하나의 거대한 작품으로 보았을 때(슬프게도 이 극은 8시간짜리 희극이다.) 그 방향과 깊이를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처제의 사생활]의 주일 아침식사에서 왜 모든 이들이 노만에게 사납게 구는 것일까? 그 대답은 [더불어 살아가기]의 제 2 장을 통해 알 게 되었듯이, 그가 2층에 누워 있는 엄마(Mum)에게 난폭한 육체적 공격을 가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또 있다. [정원을 돌고 돌아]의 제 2장에서 드러나듯이 그는 토요일밤 민들레 술(dandelion wine)에 녹초가 되도록 취해서 애니를 침대에 눕히려다 실패했다. 그는 또 사라의 성감을 자극해 놓고서는 만족시켜주지 못했으며, 레그에게 거의 동성애적인 포옹을 했다. 각각의 극은 하나의 재미있는 장난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다 합쳐지면 이 세 편의 극은 망가진 예식(사라는 한 번만이라도 문명인다운 가족식사를 하고 싶은 소망을 되풀이 강조한다.), 개인의 좌절, 조화를 못이루는 결혼생활, 엄마(Mum)의 성적탐욕이 남긴 파멸적인 유산 등 놀랄 만한 그림의 총체성을 띄고 다가온다. 이 삼부작이 실질적으로 그리는 그림은 바로 이런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애크번이, 자루같은 바지에 털모자를 쓰고 꾀죄죄하면서도 성적으로 개같이 조급해하는 피터 팬인 노만을 통해 이 모든 것을 나타낸다는 사실이다. Time and Time Again의 레오나드처럼 그도 연민을 갖고 보게 되는 파멸의 초래자이며, 풍지박산을 창출해내는 '도서관 사서'이다.
이 혼돈의 대리인 노만은 자석처럼 매혹적으로 끌어당기는 돈 쥬앙이나 금박의 아도니스가 아니라는 것이 애크번의 요점이다. 성적인 정복을 향한 노만의 본능적 열정은 그가(반쯤은) 유혹한 여인의 불행 및 실망의 감정과 일치한다. 노만은 단순히 그들 모두의 누적된 좌절을 위한 출구이다. [처제의 사생활]의 첫 2분 동안 애크번은 애니의 절망적인 고독과 어수선한 차림새, 악마같은 엄마 곁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의무감 등을 생생하게 엿보게 해준다. 왜 그렇게 단정치 못한 머리모습이냐고 묻는 사라에게 그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글세요, 아무도 봐주는 사람이 없잖아요? 우편배달부, 우유배달부, 젖소들, 그리고 어머니."  
뒤에 그녀가 살고 있는 있는 집은 '아주 더러운 갈색의 박물관' 으로 묘사된다. 심지어 그녀는 각자가 자기 일을 꾸려나가도록 남겨둘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어머니의 약에 대해 설명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모든 가족마다 하나씩은 갖게 되는 해결사, 그 것이 바로 애니이다. 성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처한 그녀는 친절한 이웃 수의사 톰(Tom)과의 맵시 없는 친구관계조차 아쉽고, 형부 노만과 함께 이스트 그린스테드에서 보낼 불결한 주말에 대한 전망도 마치 천국으로의 여행처럼 가슴 들뜨게 하는 것이다.
애크번은 매우 능숙한 솜씨를 그 차가운 납 지붕 아래서 노만을 하나의 촉매로 사용하고 있다. 그의 성적인 요구를 여인들이 기꺼이 허락하는 것은 그들의 절망의 표현이다. 애크번이 사라를 천천히 사랑의 감정에 굶주린 난파선으로 표출시키는 데서 이런 점이 가장 잘 엿보인다. 남편 레그는 은둔처인 자기방으로 들어가 장난감 비행기를 만들거나, 알아볼 수 없이 복잡한 놀이들을 고안한다. 아이들 학교에 가서는 제 자식들의 이름을 잊어 버린다. 사라는 이렇게 탄식할 수밖에 없다. "우리를 찾아온 방문객이 있을 때면 왜 당신이 곧바로 2층으로 올라가셔야 하는지 이제야 설명을 해드려야겠군요."
정상적인 인간관계의 결여로 해서, 사라는 매끄럽게 돌아가야 하는 것, 시계처럼 정확한 틀 속에 있는 일상으로 취급한다. 디너에 할애하는 많은 시간과 또 그 이후의 교양있는 대화에 할애하는 많은 시간이 이런 데서 나오는 것이다.
이 극을 본 사람이라면 사라의 역을 맡았던 피넬러피 케이스(Penelope Keith)의 연기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말하는 도중에 디너 테이블을 닦는데, "난 신경계의 고통을 많이 받아요."와 같은 간단한 대사를 직접적으로 던지며 집안 전체를 흥겨운 소란으로 띄울 수 있었다.' 고 Young은 평한다. 그녀는 마치 사적인 감정이라도 풀 듯이 은식기를 닦아대었고, 그녀가 싫어하는 사람들에겐 당혹스런 미소를 보냈다. 식탁보 까는 일을 일본의 제사의식처럼 바꾸어 놓은 여인, 오랫동안의 가족생활에 그 감정이 묻혀 버린 여인, 본 머스(Bourn mouth)에서 주말을 함께 보내자는 노만의 제안이 나왔을 때 기쁨의 비명을 지르며 맞는 이 여인 사라에 대해 그녀가 얼마나 뛰어난 연구를 했는가 알 수 있다. 한 성격이 잘 창조되었나를 테스트하는 방법은 그 인물의 무대밖의 삶을 상상할 수 있느냐 하는 데 있다. 이 점에 대해 애크번과 케이스는 완벽한 사라의 세계를 창출해냈다.

노만의 탐욕은 이 삼부작을 작동시키는 동력이자, 인물들의 불행을 드러내는 리트머스 시험지이다. 전반적인 유쾌함 뒤에서 우리는 애크번의 여섯인물들 모두가 어느 면에서 기이하고 병들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노만 자신이 사랑받고자 하는 억제 못할 욕구를 갖고 있으면서도, 성공 윤리에 가득 차서 타인을 위한 시간을 남겨두지 않는 루스와 결혼한 위태위태한 남창과 다를 바 없다. 레그는 영원한 사춘기 꿈에 사로잡혀 있지만, 인생을 마치 기차시간표처럼 다루는 사라에 얽매여 있다. 애니는 환자인 어머니에게 매어있으며, 커피에 크림을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30초 이상을 소비하는 애처러운 수의사 톰에게서 어떤 긍정적인 감성의 봉사를 기대하고 있다.
더욱 눈에 두드러지는 것은 애크번이 애니, 루스, 레그 남매가 모두 도착적이고 과잉성욕인 어머니의 희생자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개략적으로 말한다면 애크번은 판결을 내리는 작가는 아니다. 그렇지만 그가 만일 누구를 집어서 손가락질을 한다면 거기엔 그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 세 편의 극을 통해 그는 이층에 있는 이 전제적인 옛 파당의 존재를 잊도록 놔두지 않는다. '그녀는 사악한 노인네지. 저기 위에 있는 그 양반 말이야. 당신들 모두가 이렇게 뒤틀린 것도 무리는 아니야. ' 하고 노만은 애니에게 말한다. 요점을 끌어들이면서 애크번은 과거 그녀가 웨스튼 수퍼 매어(Weston-super-Mare)의 모래사장에서 한 사내를 줏어들어온 일, 한 폴랜드인 포대원과 거의 '현행범으로 잡힐 뻔 했던 일, 그리고 남편의 지붕 아래서 공개적으로 '사건'을 벌이려 했던 일을 회상하게 만든다. 심지어 아직도 그녀는 애니를 시켜 화끈한 삼류소설에서 끈적한 부분을 읽게 하고, 톰이 인간도 아는 의사이므로 세밀한 부분까지 그녀를 정밀검사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애크번은 사물들을 직접 내보이지 않을 만큼 영리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어머니의 성적탐욕이 레그를 자기 사적인 도피처로 몰아넣었다는 것, 루스를 사업이라는 길로 도망가도록 만들었다는 것, 애니를 초췌한 복종의 생활로 몰아갔었다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애크번은 대체적으로 악한을 다루는 작가는 아니다. 그러나 만일 이 작품에서 악한이 하나 나온다면, 이는 명백히 이층에서 청색 잠옷을 입고 누워있는 어머니이다.
이 삼부작에서 전달하기에 어려운 것은 이 것이 과연 얼마나 재미 있는 작품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생산되는 웃음에는 무익하거나 공허한 것은 없다. 이 작품이 그리니치에서 공연된지 한 달 후 런던에서 공연된 한 프랑스의 소극에서는, 빅토리아 시대의 한 과부가 실수로 광고에 나온 승마학교 대신에 카리브해의 한 매춘가를 구입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참 재미없는 상황설정인데, 왜냐하면 이는 진실과의 가시적인 접근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애크번의 작품은 끊임없이 우리를 웃게 만든다. 이는 우리 자신의 경험의 파편이 그 한계 바깥으로까지 밀어부쳐지는 것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처제의 사생활"에 나오는 디너파티 장면을 예로 들어보자. 사라는 가족들이 '교양있는' 식사를 즐기길 원하고, 유산계급의 품위를 잃지 않고 플라토닉한 이상에 어울리는 삶을 살 게 되기를 원한다. 그렇지만 실지로 가족들이 디너 테이블 주위에 모였을 때 일어난 일은 무엇이었던가? 누가 어디 앉을 것인가에 대해 의자를 삐걱이는 끊임없는 다툼이 생긴다. 하나는 터무니 없이 낮은 걸상에 앉게 되었다.
자식이 없는 결혼생활과 있는 대로 낳는 결혼생활의 잇점에 대해 논쟁을 벌인다. 남편이 아내에게 모욕을 주고, 또 하나는 왜 자기 여자친구를 괴롭히느냐며 한 방 먹인다. 물론 이 장면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요소 요소에서 웃읍고 재미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그렇게 크게 웃게 되는 것은 그들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일물들임을 알 게 된 때문이고, 정상적인 가족생활에 대한 개념에 맞추기 위해 애쓰는 것을 보게 된 때문이다.
기술이라는 면에서 볼 때, 애크번은 이 "정복자 노만"을 통해 자신의 개인적인 경계를 외부로 밀고 나가고 있다. (한편으로 보면 그는 극작을 고도의 게임, 지적인 자기유흥으로 바꾸고 있다.) 그러나 이 극을 함께 묶는 주제는 "상대적으로 말해서 (원제 : Relatively Speaking)" 이후로 나온 그의 극 모두를 연결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즉 우리의 사회적 가족적 삶은, 우리의 실제행동과 관련 맺지 못하는 기이한 예식들로 가득차 있다는 생각이다. 다른 극작가들은 아마도 이를 '서구의 몰락'이나 '자본주의의 부패', '유산계급의 윤리적 붕괴' 등과 연관지을 것이다. 또 어떤 극작가들은 이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애크번은 처방을 하거나 노골적으로 정치적인 언급을 하는 작가는 아니다. 그는 해결책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물론 그는 문제점들을 인식하고 있다. 그는 아주 재미있게 쓰는 작가이지만, 행동을 사회적 맥락속에 집어넣는 아주 심각한 작가이다. "정복자 노만"은 확실히 웃음을 통한 진리추구라는 애크번의 시도를 어느 정도 완성으로 이끌어간다. 이제 문제는 경계선 끝까지 이 고통을 밀어내는 데에 그가 어느 정도까지 진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작가에 대하여
앨런 애크번(Alan Ayckbourn)

 
선데이 타임즈의(Sunday Times)의 후원하에 영국 극 협회(British Theatre Association)가 연 램버트 강연에서 애크번은 열광적인 관객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이야기 했다. (발췌 요약된 내용임)
제공 : DRAMA : The Quarterly Theatre Review, Vol 1, 1988. pp. 5-7
 


나는 오늘 상업연극이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몇몇 작가들이 괜찮은 상업연극을 써보려고 애쓰지만, 이를 잘 발전 시켜나가는 데는 점점 더 어려움이 많아지고 있다. 여기에는 몇가지 이유들이 있다.
우선 첫째로 많은 작품들이 집단연극(group theatre)으로 행해진다는 점이다. 이는 예를 들어 광부의 파업과 같이 특정한 사업문제를 커버하기 위해 현장에서 행해지고 발전되는 연극이다. 그러나 이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룹의 소멸과 함께 극도 소멸되는 경우가 허다하다.예를 들어 니콜라스 니클비(Nicholas Nickelby) 같은 극 조차도 얼마나 보기 어려웠나를 생각해보라. 선반에 재어두었다가 다시 꺼내 공연할 수 있는 극은 참으로 희귀한 것이다.
두 번째 이유로는 많은 극장들이 신인 극작가들의 등장을 작업실(Sttdio writing)에 떠넘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작업은 위험부담이 적고 신인 작가들을 위해서 괜찮기는 하다. 그러나 극작가들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언젠가 그런 온실에서 벗어나 생존해야 한다. 내가 경험한 잇점 하나는 상업적 압력을 받았었다는 점인데, 이는 그냥 극을 전달하는 것 이상을 요한다. 많은 훌륭한 신인들을 키우면서 또 괜찮은 작품들이 작업실 극작을 통해 생산되고는 있지만, 대다수 작품이 재공연의 맛을 보지 못하고 사장되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보조예산의 삭감이다. 이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기도 한데, 신인 극작가들이 배출되는 런던외부의 소극장이 얻어쓸 수 있는 정부보조 재정이나 기타 지원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물론 소극장에서 조그만 규모의 극공연을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기는 하다. 그렇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좀 더 큰 곳으로 나가면 문제는 어려워 지기만 한다.
내 경우는 참 행운이었다. 스타를 노리는 풋나기 배우였던 나는, 지금까지 내가 알아온 사람들 중에는 가장 중요한 인물인 스티븐 조셉(Stephen Joseph)이 있는 극장에까지 오게 되었다. 스카버러(Scarborough)에서 자기 이름을 딴 극장을 갖고 있던 그는, 주위에 사람만 보이면 극을 써보도록 권장하는 조금은 기이한 습관을 가진 인사였다. 하긴 나 자신도 내 방에서 은밀히 쓴 극 여나믄 편이 있었으나, 내가 보기엔 괜찮은 데도 그 이상의 발전은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극작가는 혼자 고립되어서는 극작의 발전을 꾀하지 못한다. 사십여년 동안 극작생활을 했지만 한 편도 공연에 올려보지 못하고 그냥 고여서 썩어가는 슬픈 극작가도 있지 않았던가. '발전' 한 것은 타자솜씨 뿐이고.
우선 내 관심사는 배우와 연기였으므로 스티븐이 나에게도 극작을 권했을 때, 나는 과연 얼마나 내가 좋은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배우인가를 증명하기 위한 극을 한 편 썼었다. 2년 동안 나는 마치 공대지 미사일처럼 무대를 내려다보면서 극이 보통 어떻게 꿰맞추어지는가를 연구했다. 스타는 보통 제 1막의 후미에 등장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는 내 작품의 주인공도 1막 끝에 등장하도록 설정했다. 모든 웃으운 대사를 내 배역인 주인공에 집중시켰고, 심지어는 내가 할 수도 없는 온갖 재주들, 노래와 춤, 기타연주 등도 엉겁결에 내 역에 집어넣어 버렸다. 가슴을 조이며 제 1막의 말미에 무대에 오른 나는, 이 작품이 과연 내가 쓴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혼란속에서 오직 기억에 남아 나를 흥분케 한 것은 객석에서 처음 나온 웃음소리였다. 킬킬대는 조롱의 웃음이 아니었다는 확신이 서진 않았지만 어쨌든 그 웃음소리는 나를 들뜨게 한 신나는 경험이었다. 피가로의 결혼(원제 : Marriage of Figaro)에서 줄거리의 뼈대를 훔쳐와서 쓴 두 번째 극에서도 나는 횡설수설, 좌충우돌이었고, 단지 여덟 군데서만 내 창작이 들어간 세 번째 작품에서도 나는 괴물처럼 엉망인 연기를 했다. 눈꼽만한 어떤 흔적도 못남긴 작품이었다. 내 극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시켜보자는 생각이 들 때 쯤, 스티븐도 내가 연기에서 연출로 방향을 돌릴 것을 권했다.
또 다시 운 좋게도 나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 있었다. 하나는 극을 연출하는 일이고, 또 하나는 스티븐과 그 극단을 정기적으로 극을 공급하는 일이었다. 잉글랜드의 북동쪽에 있는 스카버러는 혁신적인 극으로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 무명의 작가, 무명의 배우, 무명의 연출가들이 전적으로 무명한 극형식을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는 버는 것도 없이 60년대 초의 극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최초로 공연장 내에서 애국가를 무시했으므로 사람들은 우리를 공산주의자라 부르면서 더욱 오기를 꺼렸다. 그래서 내 작품이 몇 푼을 벌어들여 생존에 도움을 주고 있었으므로 내 부담은 컸다. 더구나 분장실에 있는 동료들은 자기들이 공연할 수 있는 극을 써보라고 나에게 압력을 넣곤 했다.
극작품을 한 편 창작해내기 위해서는 구성(Construction)에 대한 지식이 대단해야 한다. 두 시간 동안 관객의 주의를 잡아당기고 있어야 하는 게 그 모두이다. 서술부와 성격, 발전부와 대사 등은 이 과정에서 필수적인 요소들이다. 그런데 하루는 스티븐이 나에게 '잘 짜인 극(Well-made play)'을 한 번만 써보라고 제안했다. 잘 짜인 극을 쓰라. 이 것은 젊은 극작가들의 귀에는 모욕적인 발언이다. 이는 극을 한 번 판매해보자는 얘기니까 연습삼아 해보자는 얘기로 들렸기 때문에 나는 별 이론을 달지 않고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작품 "상대적으로 말해서 (원제 : Relatively Speaking)"는 상업적으로 성공한 내 첫 번째 작품이었다.) 그런 작품은 기계와 같은 거라서, 약간의 동력만 주면 저절로 굴러가는 것인데 나는 그 게 도무지 마땅치가 않았다. 스티븐이 종종 작품의 진척상황이나 제목같은 것을 물어왔지만 나는 그 작품을 젖혀 둔채 건성건성 대답했다. 팸플릿 인쇄에 들어갈 제목을 나는 "어머니, 나의 어머니(원제 : Meet My Mother)"로 알려 주었는데, 이틀 후 스티븐은 "아버지 나의 아버지(원제 : Meet My Father)"가 어떠냐고 했다. 나는 아직 작품을 쓰고 있지도 않으면서 '어 그 게 더 잘 맞겠는데요.' 하고 대답했다. 그렇게 웃읍게 된 작품이 웨스트 앤드(West End)의 흥행사들에게는 흡족했던 모양이다. 일류 배우들로 캐스팅을 하고 마침내 이 작품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이 작품으로 나는 돈을 좀 벌었다. 오스본(Osborne)과 핀터(Pinter) 이후로 여전히 사실주의 극이 주류를 이루는 마당이었고, 관객들은 열광적으로 내 작품(그래, 이 것도 '작품'이다.)에 환호했다. 이제 나는 미스터 싯컴 (Mr Sit Com : 들어와 앉으라는 작가란 의미에서,<역자 주>), 혹은 미스터 라이트 엔트(Mr Light Ent : 가볍게 입장할 수 있게 하는 작가란 뜻에서, <역자 주>) 로 불리게 되었다. 3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작품이 내 작품 중 최상이라는 사람을 만날 때면, 난 아직도 모골이 송연하다.
2년 후 "나머지 반쪽은 어떻게 사랑하는가(원제 : How The Other Half Loves)"를 쓸 무렵, 나는 대스타 로봇 모울리(Robert Morley)를 만났다. 나는 작품을 쓸 때 내 극단을 위해 썼지 그를 위해 쓰지는 않았다. 나는 스타 시스템(Star system)과 무슨 원한관계에 있지는 않지만, 각 배우들에 동등한 무게와 위치를 주는 팀 플레이(team play)에 더 호감이 간다. 그런 내가 이제 이 대 배우의 존재와 충돌하게 될 것이다. 그는 처음 내 극의 육분의 일을 점령했다. 그러나 그는 점차로 삼분의 일을, 다음에는 절반을, 급기야는 내 작품의 사분의 삼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 배우를 끌어다 쓰면서 그의 존재를 염두에서 제외할 수는 없었다. 그는 거인이었고 더구나 관객의 호응과 비교할 때는 더욱 그랬다. 허긴 관객들이 이 무명작가의 작품을 보러 오겠는가?
스카버러는 나에게 위험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실패할 권리까지도 주었다. 스카버러에서의 경험을 통해서 나는 두 가지 의무를 깨닫게 되었다. 그 것은 실용적인 작가로서 관객들에게 재미(entertaimment)로 봉사해야 된다는 것이고, 또 하나 재미 외의 다른 것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둘에 균형을 주는 것은 참 미묘한 일이긴 하지만 상업연극이 기꺼이 타고 가야할 밧줄이다. 많은 사람에게 모욕감을 심어줄 수도 있고, 또 그 문제를 교묘하게 피해 버릴  소도 있지만, 관객들은 그 어느 것도 용서치 않는다. 그래서 '상업연극' 이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돈을 지불하고 와서 보는 연극, 그리고 여러번 반복해서 공연할 수 있는 그런 연극 말이다.
 

 
 연출의 한마디
체홉아저씨의 서글픈 미소를 떠올리며
이문원(현, 미국 텍사스 주립대 대학원 연극과 박사과정 재학중)
 


케네스 타이넌(Kenneth Tynam)의 명구 한마디를 먼저 소개한다. - "20세기 드라마의 역사는 하나의 붕괴된 표현양식의 역사일 뿐이다. 이 전에 신성하고 독립된 것으로 간주되던 [희. 비극의] 영역들이 꿈속의 영상같이 서로 용해되어 함께 흐른다."
부담없는 웃음과 하룻저녁의 오락거리를 찾기 위해 들른 여러분께 이 극은 다소 불쾌감을 던져줄 수도 있다. 일면 작가의 희극적 테크닉이 완벽한 코미디의 골격을 이루는 반면 극의 내용이 던져주는 인상은 여러분이 안주하고 있는 친숙한 도덕적 일상과 많은 거리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니, 처제가 형부와 함께 주말을?!" - 제목에 이끌려 이 소극장에 들어선 당신의 심중엔 매우 상반된 두 개의 정서적 반응이 혼재하여 있다. 하나는 비윤리적인, 그러나 색깔있는 내용에 대한 남부끄러운 검은 호기심일 테고, 다른 하나는 대다수의 희극물들이 보증하고 있는 '사회적 모랄로의 회귀성' 에 대한 무한한 신뢰일 것이다. 그러나 극이 끝날 무렵 당신의 이 두 가지 기대감이 모두 무너져 버린 데 대해 당혹감을 느낄 것이다. 이 작품은 시종일관 말초적 대사만 지껄이다가 적당한 짝짓기로 끝내 버리는 '섹스 코메디' 도 아니고 웃고 난 뒤 공복감을 느끼는 파이 집어던지기 식의 'slapstick' 도 아니다. 그렇다고 사회적 우둔함에 대해 일침을 가하는 아리스토파네스식의 공격성 희극은 더 더욱 아니다. 그럼 대체 뭘까?
오케이시(O'casey), 베케트(Beckett), 스토파드(Stoppard)등이 대표하는 '고통스런 주제의 경박한 표현', 혹은 희극적 고통('comic pain')이라 불리우는 20세기 특유의 표현양식은 애크번의 극작스타일을 가늠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 기준이다. "처제의 사생활" 의 희극적 표면 밑에는 혼돈속의 현대인에 드리워 있는 어두운 진실들이 도사리고 있다. 노만부부와 사라부부가 처해있는 황폐한 결혼생활, 깨어져 버린 가족들간의 유대, 개인적 이기심과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 등, 서로 소통할 수 없고 함께 어울릴 수 없는 인간 실패작들의 슬픈 이야기들을 작가는 희극적 거리감을 두고 그려내는 것이다. 베케트의 작품들이 인간의 존재론적 절망을 초월하는 기괴한 희극 효과를 연출하듯, "처제의 사생활" 역시 현대적 감각의 불편한 웃음을 제공하여 준다. 당신은 아마도 웃을 것이다. 웃어야겠지. 그러나 웃고난 후, 심지어 웃는 중에도 당신은 아픔을 느낄 것이다. "이 게 무슨 코메디야." - 가장 빈번히 듣게 될 시큰둥한 반응들의 전형적 표현일 것이다. '감각적인 쾌락의 추구' 라는 당신의 심오한 인생관의 연장선상에서 이 공연을 택하였다면 "처제..."는 귀하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다. 그러나 대신 우리들과 함께 "깨어져 버린 의식의 춤"을 추어보자. '결혼'이라는 사회적 의식, 가족으로서 함께 치러야 하는 가정의 의식들(주말의 교양있는 만찬도 포함), 그 외 일면 아름다워 보이는 일상의 '의식' 들이 개인의 삶의 의미와 얼마나 유리되어 왔는가를 함께 지켜보자. 그리고 함께 웃는 가운데 노만의 모습에서, 애니의 모습에서, 사라, 레그, 루스, 톰 모두의 모습에서 부서져 버린 당신과 나의 모습을 확인해 보자.
연출을 하는 가운데 가장 어려운 문제는 각 인물들이 갖고 있는 깊이있는 성격의 복합성이었다. 이 극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가벼운 희극성과 함께 어두운 비극성을 지닌 양면적 인물들이다. 노만은 Don Juan 같은 평면적 인물로서 하나의 단순한 동기(즉, 바람기)에 의해 움직이는 인물같아 보이지만, 그 역시 아내 루스로부터 소외되어 방황하는 상처 받은 인물이다. 톰과의 멜로드라마적 재결합이 이루어진 후 이어지는 처제와 형부(즉, 애니와 노만)간의 따뜻한 포옹을 애니의 고독과 절망이 극의 전편을 통해 'build up' 된 이후에야 무리없이 받아들여 질 수 있는데 희극내에서의 지나친 정서적 측면의 부각은 본말이 전도되어 버릴  위험부담을 안고 있다. 연출자로서의 창조적 선택이라는 부담스러운 결단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 여러 악조건들이 압력을 가해왔다. 무더운 여름, 땀내나는 좁은 공간, 귀여운 생김새완 달리 고통스런 객석, 고추장 먹고 자란 우리들의 직선적이고 즉각적인 관극성향...그렇다면 조금 더 웃겨주어야 하지 않을까?
글세, 그런데 말이다. 노력을 하면 할수록 체홉(Checkhov)아저씨의 서글픈 미소가 자꾸 떠오르는 게다. 자꾸만...
 

 캐스트

박봉서 / 노만
나재균 / 노만
박기산 / 레그
최은미 / 사라

   방은진 / 사라
   이영숙 / 애니
홍성수 / 톰
   안경아 / 루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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