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njung Theatre Company

▒  영자와 진택   ▒

이강백 작 / 정진수 연출

 민중극단 창단 30주년 기념
 제 16 회 서울연극제 공식 참가 공연
 1992년 9월 14일 ~ 26일    4 : 30  /  7 : 30
 문예회관 소극장
 주최 : 한국연극협회
 후원 : 문화부, 서울시,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작품에 대하여

 
민중극단은 극작가 이강백과 제 13 회 <서울연극제>에서 <칠산리>를 통하여 처음 만났었다. 국내의 대표적 극작가이면서 항상 상징구조를 즐겨 사용하는 우의극의 작가로 알려지고 있는 이강백의 이번 제 16 회 <서울연극제> 작품 <영자와 진택>도 같은 우의극이면서 '극 중 극'의 수법을 가미하고 있다.
막이 열리면 가상의 어느 소년 감화원이다. 남자들은 술 마시고 사람을 때리고 여자들은 도둑질 하다가 붙들려온 범법자들이다. 이 수용소에서 매년 한차례씩 후원자 및 수용자 가족들을 위한 행사를 벌이는데 과거에는 수용자들이 합창발표회를 가졌었다. 그런데 올해에는 수용자 가운데 한 명인 진택이가 대본을 쓴 연극을 공연하기를 원한다. 다만 진택의 연극대본에는 온갖 욕설과 폭력과 불결한 장면들이 많아서 감화원의 원장은 연극상연을 극력 반대한다. 그러나 수용자들의 고집이 워낙 강하여 할 수 없이 원장은 이들과 타협하여 연극대본을 일부 수정하고 합창을 몇 군데 삽입하는 조건으로 연극상연을 허락한다.
이어서 벌어지는 극중극의 무대는 어느 봉제공장이다. 그러나 물론 이 봉제공장은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그런 봉제공장이 아니라 인간사회의 한 축도로서 이 안에서 인간의 선악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 제기된다. 인간의 악은 영원히 씻어질 수 없으며 따라서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인가 아니면 인간이 지닌 선의 능력은 압도적인 악의 위력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인간을 구원해 줄 수 있을 것인가? 이 같은 철학적 또는 종교적 물음에 대하여 작가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구원가능성을 내비치는 것으로 연극을 마감하고 있다.
 

 공연에 대하여

 
<영자와 진택>은 사실적인 작품이 아니라 상징적 우의극이기 때문에 이 공연의 무대와 조명은 작품의 주제를 부각하기 위하여 단순한 구성에 추상성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연극의 정조와 무드를 살려내기 위하여 감각적이고 인상적인 효과를 겨냥하였다.
무대장치의 강경열과 조명의 정수환은 <문예회관>의 베테랑 스탭으로 있으면서 <민중극단>과는 오래 전부터 <식민지에서 온 아나키스트>, <게사니>와 같은 <서울연극제> 작품은 물론 최근의 뮤지컬 <노력하지 않고 출세하는 법>에 이르기까지 긴밀한 공동작업을 펴왔다.
특히 이번 공연의 마지막 장면의 극적 효과를 위하여 대형그림을 창작한 남희정은 섬유미술가로 현재 성신여사대 강사로 재직중인 신예작가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뮤지컬이 아니면서도 극적효과의 앙양에 음악의 역할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세 곡의 합창곡과 하모니카 연주곡을 작곡한 강선희는 <민중극단>의 뮤지컬 <서 푼 짜리 오페라>와 지난번 <노력하지 않고 출세하는 법>등에서 음악감독을 맡았었다. 이대 피아노과를 졸업하고 주로 <민중극단>과 뮤지컬 작업을 계속해 오고 있다.
한편 이 작품의 상징적 분위기의 연출을 위하여 의상디자인을 맡은 이신혜는 <서울예전>의상실에서 1970년부터 디자인 수업을 쌓으며 <민중극단>의 여러 공연, 가장 최근에는 <노력하지 않고 출세하는 법> 등에 참여하여 섬세하고 다양한 재능을 인정 받아 왔다.
이번 <영자와 진택> 공연은 전원 <민중극단>의 단원만으로 출연진이 짜여졌다. 지난번 뮤지컬 <노력하지 않고 출세하는 법>에서도 27명의 출연진이 거의 대부분 <민중극단> 단원으로 구성 되었었는데 소위 '극단'의 원래 의미가 탈색되어 가고 있는 요즈음 한 편의 공연, 가령 <영자와 진택>처럼 15명의 출연진을 요구하는 작품을 자기 극단의 단원만으로 충당하기란 불가능하다.
주인공역을 맡은 윤정원은 지난번 <노력하지 않고 출세하는 법>에 이어서 연속 주연의 행운을 얻었는데 뮤지컬 배우로서의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정통극에 있어서도 독특한 개성적 분위기와 내면연기의 저력을 겸비하여 이번 <영자와 진택> 공연에서 주인공역을 손색없이 소화해 낼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윤정원과 함께 상대역을 맡은 또 한 명의 주인공인 진택의 신종주는 <민중극단>이 이번 공연에 내놓은 비장의 신예 연기자이다. 1986년 입단이후 <민중극단>의 수많은 무대에서 수업을 쌓으면서 남 모르게 버팀목의 역할을 수행해온 신종주는 이번 공연에서 만년 조역의 이미지를 벗고 그 동안의 연기경력을 바탕으로 만만치 않게 무대를 이끌어 갈 것이다.
<민중극단>의 뮤지컬 보배인 강애심의 남편이기도 한 신종주의 주역 데뷔는 오히려 때 늦은 감이 있다.
이번 <영자와 진택>은 <민중극단>의 정평있는 앙상블을 재현해 보이기 위하여 조역들의 뒷받침이 어느 때 보다 탄탄하게 짜여졌다. 한국연극계의 중진배우로 자타가 공인하는 박봉서와 이윤미를 비롯하여 지난번 <노력하지 않고 출세하는 법>에서 가장 돋보인 연기력을 과시한 바 있는 박기산과 최은미 또한 극의 흐름을 이끌어갈 인물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었으며 감독역을 맡은 홍성수와 이웃 관리인역을 맡은 조재현, 그리고 민자역의 강애심, 애자역의 강지은 등은 이미 <민중극단>의 여러 무대에서 주역을 거쳐 연극계에 알려진 배우들이며 그 밖의 조역과 단역들 가운데도 아직은 내놓기 이르지만 조만간 숨은 재능이 빛을 발할 수 있는 신진재원들이 없지 않다.
그러나 <민중극단>의 공연은 연기자 개개인의 재능 못지 않게 오랫동안 긴밀한 공동작업을 통하여 다져진 앙상블이 연극관객들의 신뢰를 얻어왔음이 무엇 보다 중요하다.
 

작가의 말
열 가지 질문과 열 가지 대답
이강백

 
문 :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묻겠다. 당신은 왜 <영자와 진택>을 썼는가?

답 : 그 대답은 간단하다. 나는 <영자와 진택>을 쓰고 싶어서 썼다. 그러나 대답이 너무 간단하면 질문을 무시한다는 느낌을 줄 염려가 있다. 그래서 약간 복잡하게 다시 대답하면 이렇다. 나는 죄악과 구원의 문제를 다루려고 이 작품을 썼다.

문 : <영자와 진택>은 당신이 썼던 희곡들과는 매우 다른 것 같다. 지금까지 당신의 희곡들은 거의 구원의 문제를 다룬 적이 없잖은가?

답 : 그렇다. 나는 인간에게 기대를 갖거나 희망을 걸지 않는다. 그러한 기대와 희망은 언제나 좌절로서 끝났고,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냉소적인 결론을 얻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더욱 간절한 문제가 된다.

문 : <영자와 진택>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이 상습적인 도둑질, 폭행, 술중독에 걸려있다. 그러나 그 것은 인간의 죄악을 표현하기에 너무 사소하고 미약하다는 느낌이 든다. 예를 들자면 우리 사회에는 얼마나 큰 범죄가 많은가?
최근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정보사 토지 사기 매각사건'에서 보듯이, 그 규모와 질에 있어서 엄청난 범죄들이 만연해 있다. 그런 범죄와 비교해서 당신이 등장시킨 인물들은 옷을 훔치고, 술주정을 하며, 여자를 때리는 정도이다. 당신은 그 정도의 사소한 범죄로서 인간의 구원의 문제를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답 : 물론 바늘도둑 보다는 소 도둑이 더 큰 죄를 지었고, 형량도 무겁다는 것에는 동감이다. 하지만 나는 인간의 죄악을 질량에 따라 평가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본다. '정보사 토지' 정도가 아닌 이 지구를 몽땅 사기로 팔아 넘기는 범죄자가 있다 할지라도, 그가 자기의 죄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정 안할 경우, 그의 죄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까뮤가 이미 지적했듯이, 오늘 날 범죄자의 특징은 자신의 죄를 부인할 뿐만 아니라 무죄라는 알리바이마저 확보하고 있다. 이 것을 종교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자기 자신은 아무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이야말로 죄인인 것이다.
그런 뜻에서, 종교적이 아닌 관점으로는 죄인을 찾아내기란 굉장히 어렵다.
그 것은 마치 대량생산의 기계공업화 시대에, 수공업적인 유물을 찾는 것과 같다. 자기가 지은 죄를 인식하고, 그 죄 때문에 고통과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시대에 남은 최후의 로맨티스트이다.

문 : <영자와 진택>에는 세 가지 성격의 인물들이 보인다.
첫째는 당신이 말한 대로 자신의 행위에 대해 고통과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이다. 영자, 진택, 그 밖의 봉제공들이 그 부류에 속해 있다. 그런데 봉제공장의 관리인과 감독은 다른 성격으로 등장한다. 그들이 각각 무엇을 나타내는 것인지 설명해 달라.

답 : 봉제공장의 관리인은, 감화원의 윤리선생이다. 그는 감화원의 수용자들이 만든 연극속에서 봉제공장 관리인으로서 등장하는데 심한 변비에 걸려 몹시 고생하는 인물로 그려져 있다. 나는 그를 생각(사고능력)은 할 수 있어도 행동은 하지 못하는 인물의 전형으로서 나타내려 했다. 또 하나의 다른 인물, 즉 봉제공장의 감독은 관리인과는 정반대의 인물이다. 그는 옷을 홈쳐가는 봉제공들을 잡아내도록 고용된 사람인데, 그 도둑질이 근절될 경우 해고당할 수밖에 없는 흥미로운 위치에 있다. 그러니까 사실 그 감독은 사람들의 끊임없는 도둑질에 의해서 직책이 유지되는 사람인 것이다. 관리인과 감독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부분 높은 직위를 갖고 있으며, 효과적으로 자기 직책을 이용할 줄 안다. 다만 한가지 유감스러운 것은, 그들은 자기를 결코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 : 영자와 진택은 어떤 인물인가?

답 : 영자와 진택은 아까 내가 말한 수공업시대적인 인물로소, 오늘날엔 최후의 로맨티스트들이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기 전에는 많은 남자들과 관계를 가진 여자였고, 술중독에 빠져 폭행을 하는 남자였다. 그들의 사랑 역시 문제가 많은데, 그 사랑을 하면 할수록 여자의 부정행위가 반복된 것이라는 의심을 버릴 수가 없으며, 남자의 폭행이 재발할 것이라는 의구심을 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진택은, 술주정꾼인 아버지의 과거에서 자신의 미래를 예측하고, 이복형제를 낳은 어머니의 과거에서 영자의 미래를 예감한다.
어쨌든 그러한 영자와 진택이 사랑을 통해 죄의 습관을 극복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문제는 그 것으로 해결된 것은 아니다. 영자라는 인물은 동료 봉제공들의 도둑질을 자기탓으로 돌리는 소위 <높은 차원>에 이르게 되는 반면에, 진택은 그 높은 곳에 도달하지 못하고 추락한다.

문 : 소위 <높은 차원>이란 무엇인가? 혹시 종교적인 차원을 의미하는가?

답 : 그렇다. 그 높은 차원에 이르는 과정에는 세 단계가 있다고 본다. 처음에는 죄에 대한 인식단계, 그 다음 더 높이 올라가면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는 단계이다. 이 높은 차원을 굳이 사회적 구원단계라고 부르지 않는 것을 유의해 주기 바란다. 그 것은 인간(개인)과 사회를 넘어선 단계이다.

문 : 마지막 장면에서 영자는 복숭아 나뭇가지로 피투성이가 되게 구타를 당한다고 되어 있다. 하필이면 복숭아나뭇가지인가?

답 : 우리나라 민속에는 복숭아나뭇가지로 때리면 더러운 귀신이 물러나서 깨끗해 진다고 한다. 그 이미지를 차용한 것이다.

문 : 매를 맞는 영자에게서 기독교적인 <대속>을 강하게 느낀다. 당신은 기독교인가?

답 : 나는 기독교인이다. 그러나 나는 봉제공장 관리인같은 기독교인이며 영자같은 기독교인은 아니다. 그러므로 진실을 말한다면 나는 기독교인이 못된다.

문 : 당신은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당신은 인간의 구원이란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인간에 의해서도 구원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답 : 하나님이 있다면 나의 생각들과는 상관없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구원이 있다면 하나님과 인간의 구별없이 있을 것이다.

문 : 요즈음 당신의 연극에 대한 견해는 어떤 것인가?

답 : 나는 인간을 정화시킨다는 점에서 극장의 연극과 교회의 예배는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극장의 연극에는 인간이 중심이고, 교회의 예배에는 하나님이 중심이다. 그러나 좋은 연극을 구경한 느낌은 반드시 훌륭한 예배를 드린 느낌과 일치한다.<영자와 진택>에서 삶은 당근이 나오는데, 그 것의 의미하는 바를 설명하고 싶다.
말해도 되겠는가?

문 : 오직 묻는 것에만 대답하라!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구원"
정진수(극단 대표, 성균관대 교수)

 
희곡작가는 특정관객을 염두에 두지 않고 창작에 임한다. 극작가의 세계는 그만큼 넓고 함축적이다. 그러나 연출가는 특정공연, 특정장소, 특정관객을 염두에 두어야 하므로 좁고 제한적이다. 따라서 연출가는 극작가에 의해서 쓰여진 극본을 특정공연의 목적을 위하여 재해석하는 가운에 의미를 축소하고 제한하며 따라서 보다 명료하게 해야할 필요를 느낀다.
이번에 이강백씨의 <영자와 진택>극본을 받아들고 연출을 맡은 나 또한 그와 같은 과정을 거쳐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뜻밖에(과거와는 달리) 대단히 만족스러운 작가와의 공동작업의 기쁨을 누렸다. 결과적으로 크게 세 번의 극본손질 작업을 작가와의 호흡이 일치한 가운데 끝낼 수 있었다. 다만 작품의 주제인 구원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미묘한 시각의 차이가 드러났다. 나 역시 인간에 대한 신뢰를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신에 의한 구원은 더욱 신뢰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희망을 얘기하려면 신에서가 아니라 인간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으며 특히 연극을 가능하게 하려면 인간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우리는 어느 때 보다 희망적인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적어도 희망을 얘기하는 것은 언제나 좋은 일이다. 그 것이 비록 절망의 또 다른 표현일지라도.
나는 이 작품을 처음부터 종교적 알레고리로 해석했다. 변비에 걸린 관리인은 즉각적으로 인간의 구원이라는 영적 작업에 실패해 오는 동안 지치고 피로한 신의 이미지로 떠올랐다. 또 봉제공장의 감독은 항상 인간들을 악의 족쇄로 채워두어야 할 책무를 지닌 사탄의 이미지로 둔갑했다. 이 쯤 되면 파우스트의 영혼을 놓고 내기를 벌이는 신과 메피스토펠레스의 대결구도가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그리고 이 신과 악마와의 싸움이 빚어내는 도덕적 카오스속에 내던져진 영자와 진택은 곧장 카프카의 요셉 K로 비쳐졌다. 그러나 여기서 나의 결론은 비약했다. 이제 더 이상 신과 악마는 인간을 그들의 조롱물로 삼을 수 없다. 그들의 존재는 인간에게 도덕적 질서와 필요성을 상기시켜 주는 정도의 도움을 줄 수 있을 지언정 이제 그들의 역할은 끝났다.
이제 인간을 구원할 자는 인간밖에 없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구원이 이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서처럼 채찍질과 같은 아픔과 희생이 따른다 하더라도 인간의 구원을 대신할 자는 이 우주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영자의 희생과 진택의 채찍질은 따라서 인류를 위한 '대속'의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인간의 죄를 대속할 자 역시 인간 뿐이다. 신들의 존재는 인간에게 짐을 더해주기만 할 뿐이다. 신들의 이름으로 빚어진 과거 인류사의 온갖 재앙들이 말해주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들은 인간에게 그들의 교회에 나와 참배하고 제물을 바치기만을 요구한다. 이 연극에서 봉제공들로 하여금 '아가야. 아가야' 부르며 자신의 변비 걸린 배를 쓰다듬어 주기를 요구하는 관리인의 이미지는 그런 뜻에서 통열한 고발인 것이다. 인간 가운데서도 가장 어리석은 자들은 여전히 종말론 따위에서 헤어나지 못하더라도 20세기가 저물어 가는 지금 세계는 놀라운 변혁의 시대를 맞고 있다. 냉전질서는 붕괴되고 곳곳에서 민족과 개인의 자존의 외침소리가 들리며 과학문명의 발달로 인간에 의해 빚어진 핵전쟁의 위협과 공해와 환경의 파괴는 신의 은총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능력과 결단에 의해서 저지하려는 캠페인이 지구촌에 울려퍼지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신들의 개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제야말로 인간의 문제는 신의 초능력이 아니라 인간의 양식에 의하여 해결되어야 할 시대가 열린 것이다.
신이여 고히 잠드소서.
다시 깨어나거든 인간의 교회에 참배하고 속죄할 지어다.
 

 현대연극의 배경
- J, Kernan의 글에서

 
과학적 합리주의의 압력을 받아 초자연적 질서에 대한 믿음이 약화되고 또 민주적 혁명의 공세와 절대적 평등의 선언 앞에서 전통적 위계사회에 대한 믿음이 약화되면서 개인은 이제 자유롭게 자연과 사회와 그 자신과 맞닥뜨릴 수 있게 되었으며 그 것들을 원하는 대로 요리할 수 있게 되었다. 아니,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그러나 자유로운 탐구적 정신에 의한 커다란 발견들은 외관상으로는 자연과 역사의 우연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는 듯이 보였으나 역설적으로 시간과 자연속에서의 인간의 고립을 분명히 해주었다. 다윈의 종의 기원과 문화와 진화에 대한 위대한 이론은 형이상학적인 기원에서 끌어내려 도덕적이고 정당한 자가 오직 강자와 무자비한 자 아니면 생물학적으로 운이 좋은 자만이 살아남는 세계속에 편입시켰다.
마르크스의 사회에 대한 연구는 인간을 오로지 재화와 용역을 생산하고 구매하는 경제적 존재로 파악하여 인간은 순전히 경제적 이익의 추구를 위하여 타인과 교섭할 뿐이며, 원컨 원치 않건 인간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대립하는 역사운동 속에 갇혀 사는 존재로 보게 했다. 프로이드의 심리에 대한 연구는 인간에 대한 자연의 횡포를 내면세계로 까지 연장하여 인간을 잠재적 충동과 본능적인 욕구의 무력한 희생자요, 무의식의 힘에 이끌려 다니는 자동인형이며 그 자신 의식하지도 못하는 충동들을 억압하기 위하여 기묘하게 변신하는 강박적 신경불안증 환자로 만들어 주었다. 물리학은 자정능력을 지녔다고 우리가 전통적으로 믿어온 창조적 자연의 모습을 파괴하여 오직 수학적으로만 계산될 수 있는 전자적 질량으로 변환 시켰다. 상대성 이론이 우리에게 속도와 방향은 오직 현재 우리가 서있는 지점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존재한다고 밝혀주었을 때 이 우주 안에 우리에게 친근감을 줄 수 있던 마지막 징표마저 사라져버렸다....
우리의 연극은 인간이 살고 있는 우주의 위험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에 대한 믿음마저 상실한 것은 아니다. 극한까지 몰렸을 때, 모든 것이 그 의미를 상실한 이 황량한 세계속에서도 현대연극 무대의 인간은 최소한 기다릴 수 있다.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 것이 문제이다. 우리는 그 점에서는 축복 받았다. 곧 우리는 그 대답을 혼란속에서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우리는 고도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Wating for Godot 에서)
이 기다림은 어쩌면 순수한 미덕이 그렇듯이 최상의 바보인 지도 모른다.
현대연극의 대부분의 극행위에 배어 있는 모호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리 갈갈이 찢기우고 할 말을 잃었다해도 여전히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는 아직 무대를 걸어나가서 암흑 속으로 퇴장한 것은 아니다.
 

캐스트

       스탭


신종주 / 진택
윤정원 / 영자
박봉서 / 관리인
이윤미 / 어머니
박기산 / 원장, 공장장
홍성수 / 감독
최은미 / 순자
조재현 / 이웃관리인

 


강애심 / 민자
강지은 / 애자
이정아 /정자
이성노 / 감화원생, 봉제공장 공원
이창덕 / 감화원생, 봉제공장 공원
김수빈 / 감화원생, 봉제공장 공원
이미경 / 감화원생, 봉제공장 공원


강경열 / 무대장치
남희정 / 공예, 염직
정수환 / 조명
강선희 / 작곡
박팔영 / 분장
이신혜 / 의상

발췌
신의 존재와 관련한 과학자들의 생각


스테픈 호킹
- <시간의 약사>(1988)에서
 "공간과 시간이 영역이 없는 밀폐된 표면을 형성한다는 우주에 있어서 신의 역할에 대한 심대한 의미를 가진다. 우주의 현상에 대한 자연과학 이론의 성공에 힘입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이 일정한 법칙에 따라 우주가 유지되도록 허용하였으며 신은 우주의 이 같은 법칙들을 깨뜨리는 개입을 하지 않는다고 믿게 되었다. 우주에 시작이 있는 한 우리는 우주의 창조자를 상정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우주란 것이 영역도 없고 끝도 없이 완전히 자족한 것이라면 우주에는 시작도 끝도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결국 창조자의 역할은 무엇인가?"
 


폴 대이비스
- <신과 신물리학>(1983)에서
 "자연계에는 신의 존재를 상정함으로 인해서 손쉽게 설명할 수 있는 신비한 현상들이 많이 있다. 가령 천체의 기원에 대하여 현재로서는 만족할 만한 설명이 없다.
생명의 기원도 여전히 우리를 혼동시키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가지가 모두 물리학의 법칙들을 위배함이 없이 어떤 초월적 지능에 의하여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들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같은 설명은 오늘날의 과학으로 설명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나는 모든 것들을 신에게 돌리는 함정에 빠지게 된다. 이미 수없이 많은 종교지지자들이 어떤 현상에 대하여 '바로 이 것이 신의 행위다.'라고 자신있게 단언한 뒤에 얼마 가지 않아서 과학의 발달로 말미암아 그 행위가 과학적으로 명쾌하게 설명되어 지자 곤경에 빠진 쓰라린 경험들이 있어 왔다. 현재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모든 것을 덮어놓고 신에게 돌리는 짓은 마침내 거짓으로 판명되게 되며 결국 신을 무지의 친구로 만들어 버리는 짓이다.
진정 신의 존재가 입증되려면 우리가 아직 모르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미 과학적으로 밝혀진 사실들을 통해서 입증되어야 할 것이다."
 


스테프 제이 굴드
- <다윈 이후>(1973)에서
"우리가 다윈의 이론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주저하는 이유는 과학적 설명의 불충분함 때문이기 보다 다윈의 주장이 내포하는 과격한 철학적 입장, 곧 아직은 우리가 쉽사리 털어 버릴  수 없는 뿌리 깊은 서양식 사고방식에 대한 도전 때문이다.
다윈의 첫 번째 도전은 진화에는 목적이 없다는 것이다. 각 개체는 자신의 종의 번식을 위하여 후손을 만들려고 애쓴다는 것 뿐이다. 그밖에 아무런 목적이 없다. 만일 세계에 어떤 조화와 질서가 있는 듯이 보인다면 그 것은 각 개체가 그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우연적으로 나타나 보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아담 스미스의 경제이론이 자연계에 적용된 것과 같다.
둘째, 다윈에 의하면 진화에는 방향도 없다. 개체들은 필연적으로 보다 고차원의 생명체로 진화하는 것이 아니다. 당장의 환경에만 적응할 뿐이다.
셋째, 다윈은 자연을 해석함에 있어 일관되게 유물론의 철학을 적용했다. 물질만이 모든 존재의 바탕을 이룬다. 마음과 정신과 신 같은 용어들은 순전히 신경작용의 놀라운 결과들일 뿐이다.
세계는 다윈 이후 달라졌다. 그러나 결코 덜 신나고, 덜 교시적이고 덜 고무적으로 변한 건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자연 가운데서 목적을 찾을 수 없다면 우리 스스로 목적을 만들어 내야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다윈의 정신은 뿌리 깊은 서양사상의 편견과 오만, 곧 우리 인간은 조물주의 각별한 창조물로서 우리가 사는 지구와 지구의 생물들을 지배하고 통제할 천부의 권리를 부여 받았다는 망상에서 깨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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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덴자" (제 2 회 대한민국 연극제 참가작)
 □"내가 말 없는 방랑자라면"(제 4 회 대한민국연극제)
 □"게사니" (제 7 회 대한민국연극제  참가 작품)
 □"식민지에서 온 아나키스트" (8 회대한민국연극제)
 □"선각자여" (제 9 회 대한민국연극제  참가 작품)
 □영어 뮤지컬 "춘향전" (국제연극제 참가작품)
 □
"칠산리" 프로그램(제 13 회 "서울연극제" 참가)
 □"영자와 진택" (제 16 회 서울연극제  참가)
 □"이혼의 조건" (제18회 서울연극제 참가)
 □"쿠데타" 프로그램(제 19 회 서울연극제 참가)

 
 
[서울 연극제.]1977년 제 1회부터
   
 
정진수 작, 역, 연출작품명
 정진수 연극서적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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