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njung Theatre Company


   
연극의 이해   
Understanding Drama & Theatre
정진수 / 김동욱 공저
 

 

       제 1 부 희곡과 공연의 이해 : 정진수

    1. 희곡과 공연의 특성.........................9

    2. 희곡과 공연의 본질.........................17

    3. 희곡의 요소....................................36

    4. 희곡의 형태....................................51

    5. 희곡과 공연의 양식..........................60

    6. 공연의 요소.....................................66

    7. 희곡과 공연의 비평..........................90

    8. 현대연극의 의미..............................103

 

 6. 공연의 요소


서가 희곡(closet drama)을 제외한 모든 희곡은 무대공연을 전제로 쓰여진다. 이 책의 맨 앞에서 설명했듯이 다 같이 연극이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인 drama와 theatre는 각기 희곡과 공연의 측면을 강조하는 말들이며 가장 좁은 의미로는 'play(극본)' 와 'playhouse(극장)'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러니까 희곡이 내용물이면 공연은 그 내용물을 담는 그릇인 셈이다. 따라서 희곡이 주라면 공연은 종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커다란 변천을 겪어 왔다. 어찌 말하면 현대 연극의 변천과정을 연극 예술이 문학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해 가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겠는데 이 과정에서 이미 앞에서 사용한 낱말인 공연 곧, performance'라는 영어단어의 의미사용에 있어서도 변화가 있었다.
원래 'performance'라는 말이 연극에서 사용될 때는 희곡작품이 무대화된 꼴을 가리켰는데 현대 연극이 점차 희곡문학에의 의존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마침내 완전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른 1970년대 이후 이 말은 희곡, 곧 'drama' 와는 무관해졌으며 심지어 그 반대말처럼 쓰이게 되었고 장르도 연극에만 국한하지 않게 되었다. 따라서 이 때부터의 'performance'는 공연이라는 말로 번역해서 쓸 수 없게 되어 그냥 '퍼포먼스'라고 음역해서 쓸 수밖에 없게 되었다. '퍼포먼스'에 대하여는 뒤에서 따로 논의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전통적 의미로 곧 희곡의 무대화라는 뜻으로 쓰기로 한다. 물론 공연이라고 해서 마냥 희곡에 종속되어 온 것은 아니다. 특히 현대 연극에 있어서 공연은 희곡을 텍스트로 사용하면서도 희곡을 과감하게 창조적으로 재해석하여 공연을 만든 예는 얼마든지 있다. 다만 '퍼포먼스'의 경우처럼 희곡을 완전히 배제하는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는 뜻에서 공연이란 번역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또 한가지 우리말로 공연이라고 할 때 이 말은 단지 공연행위만을 가리키지 않고 전반적인 무대화 과정 및 무대제작(stage production)을 포함하는 말로 쓰고자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production'이라는 영어 단어를 연극과 관련하여 적절히 우리말로 옮길 길이 없기 때문이다. production이란 말은 일반적으로 '생산'이란 뜻이며 연극에서는 무대제작 전반을 가리키고 이 무대제작의 결과물이 공연이다. 얼핏 무대제작이라는 번역어는 편리하게 보이지만 지나치게 기술적인 용어로 들리기 때문에 가급적 사용을 피하고 공연이란 말속에 포함시키고자 한다. 예를 들어 'style production'이란 말을 우리말로 옮길 때 이를 무대제작의 양식이라고 하기 보다 공연의 양식이라고 번역하는 쪽이 더 이해가 빠르다. 그러나 'production procedure'라고 할 때는 이를 공연의 과정이라고 할 수는 없고 응당 무대제작과정이라고 옮겨야 할 것이다. 또 가령 희곡과 공연이라고 하면 연극 예술의 두 측면(곧, drama와 theatre)을 대칭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표현할 수 있는데 희곡과 무대제작이라고 하면 양자의 주종관계가 두드러진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 공연이란 말을 쓰면서 그 안에 무대제작의 과정을 포함시키고자 한다.
 

 1) 극장


연극공연이 벌어지며 또 관객이 연극을 관람하는 장소가 극장이다. 그런데 이 극장의 형태와 구조와 크기는 당연히 희곡작품의 구조와 공연의 관약(또는 관행, 습관, convention)과 양식(style)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우선 현대의 극장은 현대 연극의 특성 때문에 그 이전 어느 시대와도 다른 양상을 보인다. 과거의 극장은 그 시대 특유의 극장양식이 만들어 지며 그 시대의 모든 연극은 동일한 양식의 극장에서 공연되었다. 가령 그리스의 모든 연극은 시기에 따라 약간씩 규모와 형태가 다르더라도 모두 부채꼴형의 야외 노천극장인 그리스식 극장에서 공연되었다. 그리고 르네상스시대 이후에는 오늘날까지도 극장양식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소위 프로시니엄(proscenium) 양식의 극장에서 대부분의 공연이 행해졌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현대연극에 이르러서는 앞에서 말한 대로 프로시니엄 양식의 극장이 여전히 주류를 이룬다고는 하나 어느 한 양식의 극장이 획일적으로 지배하는 관행은 사라졌다. 프로시니엄 극장은 그 것이 주류를 이룬다 해도 하나의 선택의 결과일 뿐 극장의 양식은 프로시니엄이야 한다는 관념은 깨뜨려졌다. 오히려 프로시니엄 극장을 탈피해서 그와는 다른 새로운 양식의 극장을 탐색하려는 치열한 노력이 기울어졌다. 그 방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인위적인 극장공간 자체를 부정하는 방향이다. 인위적 공간에서 벌어지는 공연행위 자체가 인위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삶의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극장을 비롯하여 극장과 더불어 연관되는 모든 것 가령, 무대장치, 조명, 음향, 의상, 분장 등 모든 극장의 요소들을 과감히 털어 버리고 "빈 무대의 열정(bare boards and a passion)' 하나만 가지고 연극을 만들자는 것이다. 특히 새로운 연극언어를 탐색하고자 하는 실험연극의 주창자들이 추구하는 이 방향은 무대라는 개념에 대하여도 거부감을 느끼고 무대가 아닌 임의의 공간(found space) 또는 생활의 현장으로 뛰어들어가 연극을 꾸미고자 한다.
두 번째 방향은 극장을 주어진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연극창작의 도구로 이해하여 극장의 기능을 극대화하고 최대한 활용하는 방향이다. 가장 이상적으로는 매번 새로운 작품을 창작할 때마다 그 작품에 가장 알맞은 극장을 새로 설계하여 건축하는 것일 테지만 그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손 치더라도 하여튼 극장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작품에 알맞은 극장을 선택하고 그 극장의 모든 기능을 그 작품에 알맞도록 사용한다. 작품에 따라서나 연출가의 해석에 따라서는 종래의 프로시니엄 형태가 불만족스러울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도 프로시니엄 극장의 무대와 객석의 분리와 배치형식에 대한 불만이 가장 높아 새로운 대안이 다채롭게 모색되었는데 엘리자베스 조의 돌출무대(thrust stage) 양식처럼 무대가 객석으로 파고들어가 3면이 객석에 에워싸이는 형태에서 양쪽에 관객이 나눠앉고 가운데에 무대가 위치한 가로 무대(transverse stage), 그리고 아예 무대가 객석으로 완전히 에워싸이는 중앙 무대(arena staga, center stage 또는 theatre-in-the-round) 등을 꼽을 수 있다. (흔히 중앙 무대를 원형무대라고 부르는 경우를 보는데 무대 형태가 원형이 아닌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이 용어는 적당하지 않다. 무대가 가운데 위치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므로 중앙 무대란 말이 가장 좋다.)
중앙무대는 또 프로시니엄 무대와는 그 형태가 파격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흔히 비사실적인 실험연극에 알맞은 무대로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실상 보다 더 섬세한 사실적 연기를 요구한다. 무대와 객석의 거리가 가까운 데서 오는 친밀감(intimacy) 때문에 관객의 신뢰도(believability)를 높이기 위하여 더욱 사실성이 요구된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아예 무대와 객석의 구분을 철폐하고 배우와 관객이 같은 공간을 공유하도록 만드는 환경연극(environmental theatre)의 무대는 개방 무대(open stage)라고 부른다. 이상에서 예거한 여러 형태의 무대를 작품에 따라 또는 연출의 필요에 따라 수시로 무대와 객석의 구조를 변형하여 만들어 낼 수 있도록 극장을 설계할 때부터 계획한 무대를 가변 무대(flexible stage)라고 한다. 이상에서 말한 무대형태들을 채택한 극장들은 대체로 수 백 석 정도의 중 소극장들이다. 많아야 1,000 석을 넘지 않는 것이 보통인데 연극무대의 예술적 표현이 손상되지 않을 정도의 적정 규모를 대체로 7 ~ 800 석 정도로 본다.
 무대와 객석의 배치보다도 극장의 기능을 극대화 시키는 요소는 조명, 음향, 무대시설들이다. 그 중에서도 조명과 음향은 뒤에 따로 살펴 보겠지만 현대 과학 기술의 놀라운 발전에 힘입어 극장의 면모를 가장 획기적으로 변모시켜 왔다. 무대의 설비도 현대 사실주의의 대두와 함께 무대장치가 평면장치에서 입체장치로 변하면서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종전의 가벼운 평면장치와는 달리 무대를 가득 메운 무거운 입체장치를 신속하고 소리 없이 경제적으로 전환(scene transition) 시키기 위한 다양한 수단들이 강구되었는데 무대 중앙에 회전 원판을 설치한 회전무대(revolving stage), 무대 바닥의 일부를 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는 승강무대(elevator stage), 장치물을 수레에 얹어서 무대 좌우 및 후면에서 밀고 들어오고 나갈 수 있게 한 수레무대(wagon stage) 등이 널리 쓰이게 되었다. 따라서 현대의 극장은 객석에서 보이는 무대면적 보다 훨씬 더 큰 (2 배 이상) 후무대(back stage) 공간을 필요로 하게 된다. 물론 조명기 뿐 아니라 장치물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 도르레 장치(flying system)의 설치를 위해서는 무대 상층부에도 관객의 눈에 보이는 것보다 두 배 높은 무대 가옥(stage house)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위에 말한 무대설비들을 모든 극장이 고루 갖추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 같은 설비들은 고가의 투자를 요구하기 때문에 채택하기에 앞서 신중한 판단을 해야 한다. 현대의 극장은 고도의 전문적 시설인 만큼 설계과정의 선택 하나하나는 극장의 운명을 결정 짓는 주요한 선택이 된다. 극장을 지을 때 그 형태와 시설과 규모를 결정 짓기 위해서는 먼저 지역사회의 특성과 지역주민의 요구를 파악하고 왜 극장을 지으려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철학이 뒷받침되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 극장의 사용주체, 곧 예술가 또는 예술가 집단이 먼저 결정되어야 하고 그들의 의견이 설계과정에서 적극 반영되어야 한다. 극장이 사람의 옷이라면 먼저 사람이 결정된 뒤에 옷을 지어야지 옷부터 만들어 놓고 그 옷에 사람을 맞출 수는 없다. 극장건축에는 막대한 예산이 투여되기 때문에 흔히 다목적(multi-purpose)으로 극장을 짓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궁여지책일 뿐 결코 최선의 선택은 아니다. 왜냐하면 다목적이란 문자 그대로 다목적이기 때문에 어느 한 가지 목적에도 충실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극장은 흔히 연극을 보는 장소라고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극장이 연극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먼저 연극을 만드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이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 이상적인 극장은 다음 세 가지 공간들을 고루 확보해야 한다. 첫째, 관객공간(service area)은 매표구(box office)를 포함하여 주차장, 현관(foyer),로비, 화장실, 옷 보관실(cloak room) 등을 가리키며 훌륭한 극장이라면 레스토랑, 커피숍은 물론 도서실(자료실), 전시실 등을 함께 갖출 것이다. 둘째, 공연공간(performance area)인데 여기에는 위에 말한 무대와 객석(auditorium)까지를 포함한다. 객석은 전통적으로 여러 등급으로 나뉘어져 비싼 좌석일수록 무대와 가깝고 보기 좋은 위치에 놓이지만 값싼 좌석이라 해도 보고 듣는 데 지장을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민주주의의 확산과 함께 현대에 와서는 좌석의 차등을 없애고 모든 좌석이 고루 잘 보이고 들리도록 설계하는 것이 관행으로 자리잡아 가면서 객석의 규모도 위에 말한 대로 적정수준으로 줄어드는 추세이다. 세 번째는 작업공간(work area)인데 여기에는 공연을 원활히 하기 위한 후무대 공간 외에도 조명실, 음향실 등과 더불어 무대장치를 제작하는 장치 제작실(scene shop),작화실, 장치 조립 공간(assembly space), 보관 공간(storage space), 디자인실, 스태프 룸 등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극장이란 외관상 건물이며 이 건물 안에는 대단히 복잡한 고도의 전문적인 설비들이 갖추어져 있으며 건축은 물론 관리, 유지에도 막대한 예산이 소요된다. 이 때문에 민간의 상업극장은 흥행위주로 흐를 수밖에 없고 여타의 극장들은 정부나 공공의 지원을 받아 유지될 수밖에 없으며 그러다 보면 극장의 운영을 행정관리가 주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극장은 아무리 덩치가 크더라도 소설가의 펜이나 원고지, 또는 화가의 붓이나 물감처럼 창작을 위한 표현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극장의 보다 큰 운영책임은 행정관리가 아니라 예술가에 주어져야 한다.
 

 2) 연출

 
현대 연극에 있어서 연출의 역할은 제왕과도 같다. 많은 경우 극작가보다도 더 중요한 창작자로 대접 받고 보다 큰 명성을 누리기도 한다. 극작가는 연극의 역사와 거의 더불어 시작했지만 연출의 역사는 이제 고작 1 세기 남짓할 뿐이다. 연극사의 새내기에 불과한 연출가의 지위가 이렇게 높아진 것이 현대 연극의 가장 중요한 특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비록 연출가가 등장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기도 하나 실상 고대로부터 연극사의 시작과 더불어 현대적 의미는 아니더라도 연출행위는 항상 있어 왔다. 그리스 시대부터 극작가가 사실상 연출의 역할을 수행 했으며(소포클레스 때 까지는 연기도 겸했음) 중세에는 거의 전문 연출가라고 할 수 있는 'pageant master'라는 전문직종까지 있었고 셰익스피어와 몰리에르 그리고 특히 괴테는 위대한 극작가이자 동시에 권위 있는 연극의 교사였고 훌륭한 연출가의 역할을 수행 했었다. 그러나 현대적 의미의 연출이라는 분야가 도입한 것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현대 연극에서 연출가는 가장 중요한 창작자이나 실상 연출가는 무대에 등장하지도 않고 그가 직접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다시 말해서 연출가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며 동시에 모든 것을 다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연극은 종합예술이며 여기에는 극작가, 배우, 또 각 분야의 디자이너들이 참여하여 상호 긴밀한 협동작업을 벌인다. 여기에서 연출가는 어느 한 특정 분야의 책임을 맡기보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이들 각 분야의 예술가들을 통괄하여 이들이 하나의 동일한 목적을 위하여 서로 유기적으로 협동하여 한 편의 연극이 단일 예술작품(single art work)이 되도록 만든다. 곧 연출가는 한 편의 연극에 유기적 통일성(organic unity)을 부여하는 일을 맡는다. 그러니까 한 편의 연극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제기되는 수많은 문제들에 대하여 연출가가 최종적인 결정권을 행사한다. 따라서 연출가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앉아서 결정만 내리는 사람이라고 극단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대체로 연출가를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곧 해석적 예술가(interpretative artist)와 창조적 예술가(creative artist)로 나누는데 해석적 예술가로서의 연출가는 극작가의 의도를 손상하지 않도록 애쓴다. 반면에 창조적 예술가로서의 연출가는 희곡 텍스트를 배우의 연기나 여타의 모든 시청각적 요소들과 마찬가지로 단지 연출가가 자유롭게 구사하는 표현의 도구 또는 수단 가운데 하나로만 파악하고 한 편의 연극을 연출가의 창작의도에 맞추어 만들어 낸다. 이상 두 유형의 연출가 외에 양자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절충적 입장을 취하는 연출가들도 있다.
연출가들의 작업 방식은 천차만별이다. 이 세상의 연출가 수 만큼이나 다양한 방법들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위에 말한 창조적 연출가라면 창조라는 말 자체가 암시하듯이 매우 특징적인 각기 다른 방법들을 창안해 내서 사용할 것이다. 따라서 연출의 방법을 획일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애당초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러나 해석적 연출가들의 경우는 어느 만큼 작업방식에 있어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으며 이는 창조적 연출가들의 작업방식을 이해하는 데도 약간의 참고는 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연출가는 많은 사람들과 공동작업을 하며 그 가운데서도 대체로 배우들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희곡 텍스트에 의존하는 연출가라면 우선 극작가의 작품에 대한 충분한 연구를 거쳐 작품에 대한 연출의 해석에 도달한 뒤에는 공연할 극장의 조건을 면밀히 조사하고 무대화에 따른 기본 개념(concept)을 세운 뒤 배우들과 만나 연습(rehearsal)에 돌입하게 된다. 연습에 앞서 먼저 극중인물의 역할을 맡은 배우를 선발(casting)해야 한다. 배역의 방법은 공개선발(open try out 또는 audition)을 통하거나 개별선발(individual try out) 또는 그 밖의 방법을 사용하는데 특히 스타(star)의 경우는 제작자가 미리 교섭해서 결정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배역이 끝나면 연출은 배우들에게 그들이 맡은 역할의 성격, 작품의 주제, 공연의 양식 등 연출의 방향에 대하여 토론을 거쳐 공통된 이해를 가지도록 한 뒤에 블로킹(bkocking)에 들어간다. 블로킹은 연극의 매 장면에서 배우들이 위치할 구역, 곧 블록(block)을 지정하는 일이다. 블로킹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대구성(stage composition)을 짜야 한다. 무대구성은 연출의 가장 중요한 임무 중의 하나인데 무대구성의 목적은 무대 위에 위치할 배우들의 강조점(emphasis, 곧 관객이 특정 순간에서 어느 배우를 특히 주목하게 하는 수단)을 만드는 데 있다. 배우들 역시 독립된 예술가인 만큼 각자 자기의 연기계획을 수립하지만 같은 무대에서는 동료 타 배우들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일은 연출의 몫이다. 연출이 무대 위에 설 배우들의 매 순간의 위치를 지정하면서 강조점을 어디에 둘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 무대구성인데 강조점을 달성하는 수단은 많다.
논의의 편의를 위해서 프로시니엄 무대를 전제로 했을 때 우선 무대지역(stage area)을 들 수 있다. 배우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무대지역을 크게 여섯 등분하면
1. 앞무대 오른쪽(Down Right),
2. 앞무대 중앙(Down Cebter),
3. 앞무대 왼쪽(Down Left),
4. 뒷무대오른쪽(Up Right),
5. 뒷무대 중앙(Up Center),
6. 뒷무대 왼쪽(Up Left)으로 나누는데 이 가운데서 강조점의 순서는
2-1-3-5-4-6이 된다. 관객과의 거리가 가깝고 관객의 시각에서 왼쪽이 더 강조점을 가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것은 과학적 사실이기 보다 경험적 진실이다. 여기서 무대 앞뒤를 영어로 Up, Down이라고 표기하는 것은 관습인데 과거의 극장무대가 경사진 데서 유래했다.
또 배우의 무대 위에서의 신체위치(body position)에 따라서 강조점이 달라진다. 배우의 신체위치는 모두 8가지인데
1. 정면 자세(full front),
2. 후면 자세(full back),
3. 우측면 자세(right profile),
4. 좌측면 자세(left profile),
5. 오른쪽 앞반 자세(right quarter),
6. 오른쪽 뒷반 자세(right three quarter),
7. 왼쪽 앞반 자세(left three quarter) 등이다.
이 가운데 강조점의 순서는
1-5-7-3-4-6-8-2이다. 관객에게 왼쪽부터 더 많이 보이는 쪽이 더 강조점을 가진다. 여기서 배우의 신체위치는 이론상으로는 얼마든지 더 많을 수 있으나 실제에 있어서 관객이 식별가능한 신체위치는 이상 8가지 뿐이다.
이상에서 본 무대지역과 배우의 신체위치는 무대가 관객들에게 에워싸인 중앙무대에서는 강조점을 달성하는 데 통용될 수 없음을 짐작할 것이다. 그러나 이 밖에도 강조점을 달성하는 수단들은 많다. 무대 위에서의 배우의 높이(height 또는 level, 단 위에 올라선 배우가 바닥에 앉은 배우 보다 더 강조점을 갖는다.), 고립(isolation, 한데 모여있는 배우들 보다 외따로 떨어져 있는 배우가 더 강조점을 갖는다.), 대조(contrast, 다 서있는 가운데 혼자만 앉아 있으면 그 배우가 높이는 낮아도 오히려 강조점을 갖는다.) 등의 수단들이 흔히 쓰이며 그 밖에도 의상, 조명, 분장, 무대장치 등을 이용하여 강조점을 달성하기도 한다. 영화에서처럼 손쉽게 클로즈업 같은 기법을 사용할 수 없는 연극무대에서는 이 같은 수단들을 동원하여 어느 한 배우 또는 배우들에게 다 배우들과 차별적으로 강조점을 부여함에 의하여 연출은 관객의 주의를 그가 원하는 곳으로 유도한다. 이 같이 강조점이 뚜렷이 배분된 상태가 무대구성이 끝난 무대그림(stage picture)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렇지 못하면 그 것은 연출부재의 무의미한 혼돈상태에 지나지 않는다.
연출의 그 다음 작업은 무대동작(stage movement)을 만드는 것인데 무대동작은 무대구성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무대구성은 정지된 순간의 무대그림인데 무대동작이란 정지된 무대그림이 움직여서 다음 무대구성으로 옮겨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대동작은 배우의 신체이동(cross)을 통해서 실현된다. 배우는 선 자리에서 신체위치와 높이, 시선 외에도 제스처(gesture), 얼굴표정(facial expression), 태도(bodily attitude, 허리를 구부리거나 다리를 꼬는 등)의 변화를 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 또한 중요한 연기표현 방법이지만 무대구성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며 신체의 이동만이 무대동작을 일으키고 무대구성의 변화를 가져온다. 신체이동은 속도와 힘과 형태의 변화를 줄 수 있는데 형태로는 직선이동(direct cross), 곡선이동(curved cross) 그리고 나선이동(sidewise cross)으로 구분되며 이 중에서 직선이동이 가장 강하고 나선이동이 가장 약하며 곡선이동이 가장 많이 쓰인다. 그리고 프로시니엄 선과 비교하여 수평이동(horizontal cross), 수직이동(vertical cross), 사선이동(diagonal cross)으로 나누며 이 중에서 사선이동이 가장 강하며 수평이동이 가장 약하고 가장 많이 쓰인다.
연출은 무대동작을 통하여 극의 상황과 인물의 성격, 극의 템포와 리듬, 극의 형태와 양식을 표현하는데 무대구성과 함께 무대동작도 극작가의 희곡작품속에 지시되어 있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며 연출은 따라서 희곡에 쓰여지지는 않았으나 속에 '숨은 텍스트(sud-text)'를 찾아내는 데 골몰한다. 그리고 연출의 작품해석에 따라서는 극작가의 명시적인 '무대지시문(stage direction)'을 무시하고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고쳐서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런 것들 중의 하나가 소위 생활동작(stage business)인데 담배를 피우거나 꽃을 가다듬거나 하는 등의 생활동작을 통해서 극중인물의 성격이나 심리를 효과적으로 표현해 낼 수 있다.
연출가가 배우와 함께 처음부터 만들어 내야 할 것 중의 하나가 대사를 말하는 방법이다. 대사는 희곡에 글로 쓰여져 있을 뿐 어떻게 말(speech)로 표현해 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순전히 연출가와 배우의 몫이다. 말은 인간의 음성(voice)에 의하여 만들어지는데 음성은 다시 음고(pictch), 음량(volume), 음질(quality)의 변화를 수반한다. 따라서 훌륭한 배우는 다년간에 걸쳐 음성을 이루는 세 가지 요소들을 최대한 변화 있게 구사할 수 있는 음성훈련(voice training)을 받아야 한다. 이 같은 훈련을 거친 배우들과 함께 연출가는 그의 작품해석에 알맞도록 위에 말한 음성적 자질들과 말이 가지고 있는 요소들, 곧 발성(articulation, 소리의 생산), 발음(pronunciation, 바른 소리의 선택), 길이(duration), 억양(inflection)등을 적절히 구사하여 의도하는 표현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러나 해석에 앞서 기본적으로 연출가가 배우와 함께 책임져야 할 부분은 대사가 '잘 들리고(audibility)'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intelligibility)'하는 것이다. 연출이 대사의 해석에 골몰하다보면 기본적으로 더 중요한 이 두 가지 점들을 소홀히 하기 쉽다. 그러나 특히 현대 연극에 이르러서는 말 못지 않게 말이 없는 사이(pause)나 침묵(silence)이 말 보다도 더 중요한 구실을 할 때가 있다. 그리고 뒤에 논의하겠지만 소위 현대의 실험적인 비언어적 연극에 있어서는 말이 아니라 비명, 괴성, 한숨 등과 같은 소리가 말 보다도 더 중요한 구실을 할 경우도 있다. 결국 연출가는 그의 의도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그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최대한 활용하여 작품창작에 임한다. 연출가에게 있어서 한계는 그 자신의 상상력의 한계만이 있을 뿐이다.
위에서도 극장 또한 연출가의 표현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연출가는 극장이 제공하는 모든 요소들, 극장의 형태 뿐 아니라 무대, 조명, 음향 등의 요소들 또한 최대한 활용하여 그의 의도를 보다 효과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하여 노력한다. 그래서 배우들과의 작업에 들어가기 훨씬 전부터 극장에 대한 조사는 물론 극장에서 일하는 무대 스태프들 특히 무대장치, 조명, 음향, 의상, 분장, 대소도구 디자이너들과 디자인 전반에 대한 긴밀한 협의를 시작해야 한다. 디자이너들에 관해서는 논의를 뒤로 미루기로 하고 이 장을 마친다. 다만 연출가는 방금 열거한 디자이너들 뿐 아니라 작곡 및 편곡자와 안무가들과 공동작업을 해야 할 경우도 있으며(뮤지컬이 아니더라도) 때로는 무대격투(stage combat) 전문가, 역사학자, 인류학자 등 여러 방면의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야할 때도 있고 특히 현대 연극에 있어서는 영상매체의 활용을 위하여 영상전문가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컴퓨터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3). 연기

 
흔히 연극을 가리켜 배우예술이라고 하는 말을 듣는다. 사실 배우의 연기는 연극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이다. 앞의 장에서도 말했듯이 연극을 이루는 다른 모든 요소들을 없애도 배우의 존재만 있으면 연극은 훌륭히 존재한다. 그래서 "연극은 살아 있는 배우의 현존으로 시작하고 끝난다(Theatre begins and ends with the actor's living presence)"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연극예술이 이원성을 지녔듯이 배우 또한 이원성을 지녔다. 배우는 그 자신이 창작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창작의 도구이다. 다시 말해서 배우는 그 자신의 몸을 도구로 사용하여 연기예술을 창작한다. 그런데 이 몸은 소설가의 펜이나 화가의 붓처럼 단순한 오브제가 아니다. 그 몸은 창작자의 의지에 따라 마음대로 움직여지는 몸이 아니라 몸의 주인인 인간의 전인격적 표현인 것이다. 곧 몸을 움직이는 도구로서의 자아가 있고 그 자아를 움직여 연기를 시키는 예술창작자로서의 자아가 또 있는 셈이다. 이 두 개의 자아가 서로 대화하고 협동하고 대립하고 갈등하면서 연기예술이 빚어지는 것이다.
이 같은 연기예술의 특성을 장점으로 볼 수도 있고 단점으로 볼 수도 있다. 이를 단점으로 보는 쪽은 도구의 불완전성을 지적한다. 그 도구가 인간이기 때문에 창작자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종종 배반할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불행한 일을 당한 코메디언이 무대에서 관객을 웃긴다는 일이 배우도 인간이기 때문에 쉽지 않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크래이그(Gordon Craig)는 배우를 실물대의 인형(super marionette)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아피아(Adolphe Appia) 같은 이론가는 음악의 운율학(eurhythmics)을 원용하여 상형적(hieroglyphic, 동양 전통연극의 추상적 표현기법을 연상케하는) 표현기법을 개발하기 위해 애썼으나 이 것이 실제적으로 불가능하자 많은 실험연극의 주창자들은 배우의 인격성을 제거해서 오직 도구로서의 기능만을 성실히 수행해 낼 수 있는 각종 연기 훈련방법들을 고안해 내기도 했다.
동시에 배우의 인간성을 장점으로 보는 견해 또한 엄존한다. 특히 현대 사실주의에 이르러 무대 위에 등장하는 인물의 연기는 단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몸뿐이 아니라 내면의 심리세계와 복잡한 감정의 표현을 요구하게 되면서 배우의 인격성(personality)은 더욱 중요시 되었다. 배우가 인간이기 때문에 노정될 수밖에 없는 표현의 불완정성과 변덕(caprice)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관객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은 화려한 무대장치나 조명효과보다도 살아 움직이며 공감하고 정서적으로 동일시( emotional identification)할 수 있는 납득가능(convincing)한 인간상이다. 특히 클로즈 업 같은 기법을 통하여 보다 섬세한 연기표현이 가능해진 영상매체의 대두 이후에 배우의 인격성은 더욱 강조되었다. 바로 이 때문에 배우의 연기를 추상화하려는 시도들은 그 자체로서는 연극언어의 지평을 확대시키기 위한 매우 의미 있는 노력임에도 불구하고 일반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실험연극의 범주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시도들은 연극사에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기고 그 창안자들(주로 연출가)은 그로 인해 커다란 명성을 얻기도 했지만 그런 연극을 통해서 그에 버금할 만한 명성을 남긴 배우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는 사실은 배우예술을 논하는 자리에서 새겨 볼 만한 대목이다.
배우를 가리켜서 영어로 'actor(또는 'actress')'라고 하는데 이는 곧 'acting(연기)'을 하는 자, 우리말로 직역해서 '행동하는 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배우의 행동이 자기 아닌 다른 인격주체로 변환해서 행동하는 자는 'actor'라고 불리나 자기자신으로 행동하는 경우에는 소위 'star' 아니면 'performer'라고 불린다. 스타는 대중적 인기를 누린다는 측면에서는 찬미의 뜻이 담길 수 있지만 다른 인물로의 변신이 능하지 못하다는 뜻에서는 조소의 의미가 담긴다. 그래서 로렌스 올리비에 같은 대배우는 한사코 스타로 불리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그리고 'performer'라는 말은 전통적 연극의 문법을 거부하는 실험적 연극에 출연하는 배우들에게 붙여지는 말인데 이들의 연기는 인격의 표현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연출가로부터 부여받은 임무의 수행에 목적이 있는 만큼 전통적인 배우들보다 훨씬 더 긴 수련의 과정과 더 힘든 고난도의 연기를 요구 받더라도 그의 연기는 개별적 평가를 받기 보다 공연 전체의 한 요소로만 취급 받고 때로는 연출가의 꼭두각시라는 달갑지 않은 대접을 감수해야 하며 그들 스스로 예술가로 대접 받기를 원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위에서 배우는 'acting'을 하는 자라고 했는데 실상 훌륭한 배우는 어떤 행동을 하기에 앞서서 불필요한 행동을 하지 않는 자라고 정의할 수 있다. 모든 예술의 미덕은 절제에 있다고 하는데 연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설익은 배우는 무대 위에서 무슨 행동이라도 쉴 새 없이 하는 것이 연기이고 가만 있으면 안 된다는 강박감에 시달리지만 정작 훌륭한 배우라면 꼭 필요한 행동만 '골라서' 한다. 앞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은 선택이라는 말을 했다. 이는 배우예술에 있어서 가장 적절한 표현인데 배우는 무대 위에서 그가 맡은 인물의 모든 면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극작가와 연출가에 의해서 그 인물에게 부여된 기능(function)만을 선택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그 말을 뒤집자면 그 인물에게 요구되지 않은 면의 표현을 자제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뜻에서 "배우의 예술은 실상 반응의 예술이다(The art of acting is really an art of reacting)"라는 말의 의미도 곱씹을 필요가 있다. 연기는 능동적인 행위이기 보다 어떤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피동적 행위 쪽에 가깝다.
서예를 연습할 때 헌 신문지에 한다. 종이를 아끼기 위해서다. 그러다 실전에 임하면 하얀 백지를 사용한다. 신문지에 쓴 글씨는 알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백지에 먹으로 쓴 글씨는 뚜렷하게 보인다. 배우의 연기는 하얀 백지에 쓴 글씨처럼 선명하게 나타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소 배우의 몸이 하얀 백지와 같아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의 몸은 특히 제약이 많은 현대의 생활에 찌들려서 이미 신문지처럼 지저분하고 구겨져 있다. 배우의 훈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몸을 하얀 백지로 되돌려 놓는 일이다. 신체의 온갖 긴장(tension)을 제거하고 이완(relaxation)의 상태를 회복시키는 것이 연기훈련의 요체인 것이다. 이완의 상태에 도달한다는 것은 그 어느 쪽에도 쏠리지 않는 중립(neutrality)의 상태에 이른다는 것이며 그 것은 신체 뿐 아니라 마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연기를 잘 해야겠다는 생각에서부터 온갖 세속적, 인간적 욕구로부터 자유로울 때 훌륭한 연기역량이 배양될 수 있다. 왜냐하면 배우는 연기표현을 위하여 헤이스(Helen Hayes)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기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능력(sensibility)'과 '타인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는 능력(sensitivity)'을 고루 갖추어야 하는데 자신의 이기적 목적에 갇혀 있으면 이 같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현대 연극에서 연기훈련의 과학적 토대를 마련한 러시아의 연출가이자 연기의 교사인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시시한 배역은 없다. 시시한 배우만이 있을 뿐이다.(There are no small parts, only small actors)"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 말은 어떠한 배역도 배우가 연기하기에 따라서는 그 인물에 대하여 찾아낼 수 있는 여지가 알마든지 있다는 나름대로 가치 있는 충고이지만 사실과는 다르다. 시시하다기 보다는 작은 배역은 얼마든지 있다. 출연의 빈도와 대사량뿐이 아니라 그 인물에 대하여 극작가가 부여한 기능이 단순하기 때문이다. 극 중의 인물은 아무리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해도 어디까지나 작가의 인생에 대한 해석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극작가가 허구적으로 꾸며낸, 제한적 기능을 수행하는 가공의 인물이다. 그 인물이 현실의 인물을 닮을 수는 있어도 현실의 인물처럼 다면적일 수는 없다. 아무리 사실적으로 보이도록 그 인물에 대하여 구석구석 섬세하게 그려진 주인공이라 할지라도 극 중의 인물은 실제인물과는 달리 예술가의 의도에 맞추어 예술적으로 처리된 허구의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배우가 이 허구의 인물을 연기해 낼 때 '예술적으로 처리된 부분(그 인물에 대한 해석, 또는 극 중에 부여된 그 인물의 기능)'을 강조할 것인가 아니면 '실제 인물과 닮아 보이도록 그려진 부분'을 강조할 것인가? 곧 예술성을 강조하느냐, 사실성을 강조하느냐는 문제는 연극사의 초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연기이론의 양대 산맥을 형성해 왔다. 전자를 외적 접근 방법이라면 후자는 내적 접근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의식적 기교를 중시하는 전자는 가슴 보다는 머리로 연기하며 심리적 진실성을 중시하는 후자는 머리 보다는 가슴으로 연기한다.
현대 사실주의의 대두와 함께 크게 각광을 받은 후자의 이론은 소위 줄여서 '메서드(Method)'라고 일컬어지는 최초의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연기방법론이 스타니슬라프스키에 의하여 개발되므로서 더욱 승세를 탔다. 이해보다는 오해를 더 많이 받아 도움 못지 않게 혼란도 자주 일으켜 온 스타니슬라프스키의 방법은 종래의 내적 접근방법을 과학화하려는 시도인데 배우가 극중인물의 내적 느낌, 곧 영감(inspiration)을 가지게 되면 그가 외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그 인물의 진실된 행동으로 보여질 것이라는 가설에 입각산한것이다. 문제는 이 영감이란 것이 원하는 순간에 항상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떠오를 때까지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오랜 훈련의 과정을 통해서 "마치 조건반사처럼 영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의식적인 기교(conscious technique for causing inspiration as a conditioned response)"를 개발하려고 애썼다.
그의 말을 인용하자면 "모든 신체적 행동은 그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내면의 심리적 행동을 지니고 있으며 모든 심리적, 내적 행동 안에는 그 심적 상태를 표현해 주는 신체적 행동이 있다(Every physical action has an inner psychological action which gives rise to it, And in every psychological inner action there is always rise a physical action which expresses its psychical nature)." 이 같이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인간의 신체와 심리 사이에는 유기적 연결고리가 있어서 어느 한쪽을 통해서 나머지 한쪽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이론이 실천에 있어서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둔 것도 사실이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메서드는 그 것이 최초의 과학적 연기 훈련방법이라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이론은 심리적 진실성에 치우쳐 있어서 위에 말한 극중인물의 허구성, 곧 예술적 기능을 소홀히 한 측면이 있을뿐더러 사실주의의 퇴조와 함께 새롭게 등장한 반사실주의 연극들, 특히 브레히트의 서사연극의 이론과 충돌하게 된다. 그리고 이상적인 연기란 위에 말한 외적 접근방법과 내적 접근방법을 절충하여 얻어지는 것이지 어느 한쪽에 지나치게 기울어지면 반대쪽에서 약점을 드러내게 된다. 그래서 훌륭한 배우는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cold head and warm heart)"으로 연기한다는 말을 한다. 극중인물과 정서적 동일시를 하고 그 인물 안에 빠져들면서도 빠져드는 자기자신을 통제(control)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원숙한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음악에 흠뻑 빠져들면서도 연주할 때 음악적 규칙들을 하나도 어기지 않는 것과도 같다.
 

 4) 디자인


한 편의 연극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수 많은 분야의 디자이너(designer), 혹은 디자인 아티스트(design artist))들의 참여가 요구된다. 무대장치 디자이너(scene disigner), 조명 디자이너(lighting designer), 음향 디자이너(sound designer), 의상 디자이너(costume designer), 분장 디자이너(make-up designer)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목수, 조명기사, 음향기사, 재단사, 분장사와는 전혀 다르다. 앞의 사람들은 예술적 작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고 뒤의 사람들은 기술자들에 지나지 않는다. 가령 음향 디자이너라면 응당 음향기사만큼은 아니더라도 음향 기기를 전문적으로 취급할 수 있어야겠지만 정작 그의 임무는 한 편의 연극을 위하여 음향을 예술적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다. 예컨대 어느 연극에서 기차소리가 필요하다면 그의 주 업무는 어떤 종류의 기차소리를 언제 어느 만큼의 크기로 얼마동안 어떤 변화를 주면서 내주어야 그 장면에서 연출가가 의도한 효과를 낼 수 있느냐를 결정하는 데 있다.
여기서 예술적이란 말은 그 소리가 미학적으로 아름다워야 한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예술적인 표현이 이루어졌다는 말은 그 장면에서 의도했던 효과가 적확하게 실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순간에 관객은 미적쾌감을 느낀다. 연기에 있어서 충실한 사실적 연기가 항상 선이 아니듯이 디자인에 있어서도 그 자체의 아름다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것들이 공연 전체의 의도에 얼마만큼 기여하느냐에 따라서 성패가 갈린다.
먼저 무대장치 디자인의 측면을 살펴보자. 무대장치의 관념은 비교적 근래에 생겨났다. 그 역사적 고찰은 이 책의 2부에서 다루어지겠지만 무대장치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 이후 실내극장이 생겨나고 소위 원근화법에 의한 회화적 장치술이 개발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이 때부터 19세기까지의 무대장치는 평면적 장치였으며 배우들의 연기를 보조하는 회화적배경(pictorial background)에 그쳤다. 19세기 후반에 사실주의가 대두하면서 입체적 장치가 등장하고 장치의 개념도 인간관의 변화와 더불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간의 운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환경(environment)의 개념으로 바뀌면서 현대적인 무대장치가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무대장치가 본격적으로 예술적 표현수단으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은 상징주의의 도전과 함께 위에 잠시 소개했던 크레이그와 아피아의 이론적 뒷받침이 큰 역할을 했다. 특히 크레이그는 "예술은 디자인이다(Art is design)"라는 주장과 함께 무대장치의 추상적 표현 가능성을 열어 주었고 아피아는 특히 무대조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종전의 초점 없는 일반조명(general illumination)을 배격하고 렌즈를 사용한 특수조명(specialized illumination)을 통해 사실적 묘사보다 정조(mood)의 표현을 강조했다.
무대장치를 이루는 요소들은 선(line)과 색(color)과 매스(mass, 모양과 크기 그리고 그 것들이 차지하는 공간을 포함)와 질감(texture)의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디자이너는 연출과의 긴밀한 협의를 거쳐 이들 요소들을 동원하여 공연의 의도를 실현시키는데 기여해야 한다. 여기서 선은 1차원적으로 길이와 방향을 표현해 주는데 직선이냐 곡선이냐 등에 따라 각기 다른 정서적 반응을 유발시킨다. 매스는 2차원과 3차원으로 표현되며 공간을 차지한다. 따라서 크기와 넓이와 두께 및 위치(position)를 통해 역시 다양한 정서적 표현을 한다. 한편 색은 가장 민감한 정서적 반응을 유발시키는데 색상(hue)과 순도(saturation)와 음양(value)의 변화를 통해서 인간의 감정세계를 오묘한 경지까지 표현해 낼 수 있다. 질감 또한 부드러움과 거칠음의 대조를 통해서 다양한 정서적 반응을 유발시킨다.
이 같이 현대의 무대장치는 장소의 설명과 등장인물의 사회적 지위와 성격, 극의 배경과 시대 뿐 아니라 선과 색과 매스와 질감의 변화를 통해서 추상적인 감정의 세계를 표현하는 데까지 영역을 확장시켜나가므로서 사실주의의 퇴조 이후에도 연극적 표현수단으로서의 중요성을 더해가고 있다. 그리고 정서적인 표현만이 아니라 기능적인 면에서도 장치의 역할은 다양하게 사용되는데 가령 러시아의 극장주의자들이 고안한 소위 구성주의(constructivism) 무대장치는 장소의 관념을 떠나서 배우들을 무대 위에 배치하는 틀로서 서커스의 무대처럼 다양한 연기동작을 가능하도록 도와준다. 한편 현대 대중 오락의 총아인 뮤지컬에서는 <미스 사이공(Miss Saigon)>의 헬리콥터나 <오페라의 유령(Phan-tom of the Opera)>의 샹들리에처럼 무대장치물이 배우를 대신해서 배우보다 더 압도적인 연기를 해내는 경우까지 현대의 무대장치는 단순한 볼거리(spectacle) 이상의 역할을 떠맡고 있다.
무대조명은 무대장치 보다도 역사가 길지 않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2000 년이 넘도록 연극은 대낮에 야외극장에서 태양광선에 의지하여 공연되었다. 르네상스 이후 실내극장이 생기면서부터 인공조명 수단을 사용하면서 조명예술에 대한 관념이 싹텄으며 당시의 조명예술의 발전은 무대장치 보다도 뒤쳐질 수 수밖에 없었다. 실상 조명수단의 빈곤이 무대장치술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역설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원근화법에 의한 회화적 무대장치는 흐릿한 불빛 아래서만 효과를 발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9세기에 들어와서 가스등(gas light)이 발명되고 이 것이 극장에 도입되면서 무대조명은 비로소 예술적 표현수단으로서 각광을 받기 시작한다. 가스등은 가스를 공급하는 가스통의 밸브를 조절함에 의하여 밝기와 켜고 끄기를 인공적으로 손쉽게 통제(artificial control)할 수 있게 되므로서 원하는 조명 효과를 비로소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가스등은 화재의 위험 등 몇 가지 치명적 결함 때문에 반전에 한계가 있었고 19세기 말에 이르러 전기의 발명과 함께 백열등이 등장하면서 오늘날과 같은 무대조명의 획기적인 발전의 계기가 만들어졌다.
조명이 예술적 표현수단이 될 수 잇는 조명의 성질, 곧 인공적으로 손쉽게 통제가 가능한 조명의 요소들을 들자면 빛의 밝기(intensity),색상, 배분(distribution) 그리고 운동(movement)이 그 것들이다. 밝기는 전원을 통한 전기의 공급량의 증감과 사용하는 조명 기기의 숫자에 의해 조절된다. 색상은 소위 젤라틴(gelatin)이라 불리는 것과 같은 착색물질(color filter)을 조명기 앞에 부착하여 만들어 낸다. 빛의 배분은 조명기의 램프 앞 부분에 원하는 렌즈를 부착하여 빛의 확산을 막고 빛을 원하는 지역에만 비추도록 하므로서 이루어지는데 렌즈의 사용과 더불어 조명기의 설치 위치와 피사체의 거리도 배분에 크게 작용한다. 끝으로 빛의 운동은 조광기(dimmer)를 이용한 밝기의 조절과 공연 중 색상의 변화와 조명을 비추는 지역의 변화를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흔히 뮤지컬 같은 데서 보는 이동 스포트라이트(follow spotlight)의 사용은 그 두드러진 경우이다.
이렇게 조명은 밝기와 색상과 배분과 운동을 통하여 공연에 무수한 변화와 효과를 가져다 줄 수 있다. 시간의 설명은 물론 계절의 변화, 날씨의 상태, 광원(light source)의 방향, 장소와 시대의 표현(무대장치에 부착하는 조명기기를 통해서) 등의 사실적 묘사 뿐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극의 정조와 분위기(mood and atmosphere)를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해 낼 수 있다. 이 밖에도 천둥, 번개, 화재 등의 특수효과를 만들어 내기도 하며 점멸등(strobe)이나 요즘 쇼 무대에서 자주 쓰는 가변등(variable light)과 같은 특수 조명기기들을 이용하여 현란한 무대효과를 창출하기도 한다.
무대음향은 그 역사가 연극의 역사만큼 오래 된다. 원래 연극은 보는 연극이 아니라 듣는 연극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연극관객을 영어로는 'audience'라고 하는데 이 말은 우리말로 옮기면 관객이 아니라 청중이다. 가장 오래 된 배우는 신체적 연기보다 운문시를 낭송하는 배우였다. 사실 배우의 화술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무대음향 효과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현대의 실험적 연극예술가들은 연극에서 언어를 추방하면서 배우의 육성을 이용한 다양한 음향효과를 중요한 연극적 표현수단으로 활용한다. 그러나 음향효과를 말하는 자리에서 배우의 대사를 논외로 친다고 하더라도 고대로부터 연극에서 음향은 매우 중요했다. 우선 고대로부터 연극에서 음악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성을 차지했다. 실상 고대의 연극은 총체연극(total theatre)이었고 여기에서 음악은 핵심적인 부분을 담당했다. 그리고 배우의 대사와 음악을 제외하고도 자연음이나 인공적 음향의 사용은 오래 전부터 연극에 자주 이용되어 왔는데 이런 음향효과들을 내기 위한 다양한 기계장치들에서도 알 수 있다.
현대 연극에 있어서도 여전히 자연음이나 인공적 음향을 내는 기계장치들이 쓰이지만 20세기에 들어와서 소리를 재생할 수 있는 녹음장치의 발명으로 음향에 대한 통제도 훨씬 용이해졌고 보다 풍부한 소리들이 무대효과를 위해 쓰이게 되었는데 근래에 와서는 컴퓨터까지 응용하여 아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소리를 창의적으로 제조하는 데까지 기술이 발전하여 연극에서 음향의 역할은 어느 때 보다도 증대될 것으로 기대된다. 영상기술의 발달에 영향 받아 연극무대에서도 영상기술을 응용하는 소위 다매체연극(theatre of mixed means, or mult-media)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음향기술의 출발은 영상매체보다 늦었으나 지금은 오히려 영상분야를 능가하고 있기 때문에 연극이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할 때 음향기술의 영향은 훨씬 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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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njung Theatre Comp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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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의 이해

      제 1 부 희곡과 공연의 이해 : 정진수
 

    1. 희곡과 공연의 특성.........................9   

    2. 희곡과 공연의 본질.........................17

    3. 희곡의 요소....................................36  

    4. 희곡의 형태....................................51  

    5. 희곡과 공연의 양식..........................60  

    6. 공연의 요소.....................................66  

    7. 희곡과 공연의 비평..........................90  

    8. 현대연극의 의미..............................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