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njung Theatre Company


   
연극의 이해   
Understanding Drama & Theatre
정진수 / 김동욱 공저
 

 

       제 1 부 희곡과 공연의 이해 : 정진수

    1. 희곡과 공연의 특성.........................9

    2. 희곡과 공연의 본질.........................17

    3. 희곡의 요소....................................36

    4. 희곡의 형태....................................51

    5. 희곡과 공연의 양식..........................60

    6. 공연의 요소.....................................66

    7. 희곡과 공연의 비평..........................90

    8. 현대연극의 의미..............................103

 

 8. 현대연극의 의미


우리는 이 책의 앞부분에서 드라마의 본질은 인간의 행동이라고 말했으며 우리가 드라마를 보는 이유는 인간의 행동 가운데도 '신기한(strange)' 행동을 보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또한 드라마의 행동은 단지 신기한 느낌을 주는 데서 머물러서는 안 되고 동시에 친숙(familiar)하다는 느낌을 주어야 하며 어떤 행동이 친숙하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 행동을 식별할 수(recognizable) 있어야 하고 또 납득할 수 (convincing) 있어야 한다고 했다. 어떤 행동을 우리가 식별할 수 있다는 것은 그 행동이 '무엇하는' 행동인가를 우리가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을 뜻하며 납득할 수 있다는 것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를 우리가 수긍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왜'는 행동의 동기(motive)를 말하는 것으로 우리가 어느 행동을 납득할 수 있다는 것은 곧 그 행동의 동기를 납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인간 행동의 여러 단계를 설명하면서 이들 행동 사이에는 위계가 있으며 윤리적 행동의 단계가 인간 행동의 최상위에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주제를 설명하는 가운데 모든 드라마에는 명시적이건 암시적이건 주제가 들어 있다고 했고, 이 말은 희곡의 본질을 논의하는 장에서 예술가는 예술작품을 창작하는 과정에서 인생에 대한(또는 현실, 우주, 자연에 대한) 해석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고 한 말과도 상통한다. 결국 모든 인간의 행동에는 반드시 배후에 동기가 있으며 궁극적인 동기는 윤리적 동기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적어도 서양에 있어서 19세기 전반까지의 윤리적 동기는 기독교 신앙 또는 윤리 안에서 찾아질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19세기 전반까지의 인류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판별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가치기준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 기준은 인간의 권능 바깥의 어떤 초월적, 절대적 존재에 의하여 주어지고 있다고 믿어졌다. 이 기준에 의하여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옳은 행동과 그른 행동이 나누어 질 수 있었다. 비록 사람은 악의 유혹에 빠지기 쉽고 선을 행하기 어려운 존재이지만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원칙만은 가지고 있다고 믿었으며, 때로 현세에서 선이 보상 받지 못하고 악이 승리하는 듯이 보이더라도 내세에 가서만은 선이 보상 받고 악이 징벌당할 것이라는 신념만은 확실히 가지고 있었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브로켓의 말대로

정극에 있어서 착한 인물은 항상 승리를 거두는데 그 것은 신 또는 섭리가 인간사를 내려다보고 정의의 궁극적 승리를 보증해 주고 있음을 암시한다. 낭만극에 있어서는 주인공이 흔히 죽음을 당하더라도 그 것은 어떤 불가사의하고 회피할 수 없는 운명이 결과를 예정해 놓고 있는 듯이 보인다. 어느 경우이건 결과는 인간의 통제 밖에서 이루어진다.
In melodrama, the virtuous characters were always triumphant, thus implying that God or Providence watches over human affairs and insures justice, while in romantic drama, in which the heroes often met death, some inscrutable or unavoidable fate seemed to determine the outcome. In either case, the outcome was made to appear outside human control.

인간 바깥의 어떤 초월적 존재가 인간사에 개입하고 있다는 이 같은 생각은 르네상스 시대로부터 서서히 도전 받아 왔으나 이 것이 하나의 사상적 체계를 이루게 된 것은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였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콩트(Auguste Comte)의 <실증철학(Positive Philosophy, 1830~1842)에서부터 과학적인 기반을 갖기 시작한 현대사상은 현대를 그 이전의 모든 시대의 근본적으로 구별 짓게 하였다. 이 같은 현대사상의 기본적인 시각을 일찍이 정립시킨 초기의 두 위대한 사상가로 다윈과 프로이트를 꼽아야 할 것이다.
다윈(Charles Darwin, 1802~1882)은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 1859)>에서 모든 생명체는 동일한 조상에서부터 서서히 진화되어 왔으며, 이 같은 진화는 적자생존의 법칙에 의하여 자연적 선택의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져 왔고 모든 생명 현상은 유전과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고 설명했다. 다윈의 이 같은 이론이 가져다 준 가장 큰 사상적 전환은 신 또는 초월적 섭리가 떠맡아 왔던 역할이 그 중요성을 잃어 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인간이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환경과 유전의 산물로서 필연적인 진화의 과정을 거쳐왔다고 했을 때 종전의 도덕에 대하여 부여해 왔던 의미가 크게 약화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실상 다윈의 생각은 전적으로 독창적인 것은 아니나 그의 영향이 그렇게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그의 주장이 반박할 수 없을 만큼의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윈의 이론이 내포한 심대한 함축적 의미가 즉각적으로 알려지고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다. 비록 인간의 육신은 생물학적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할 지라도 인간의 정신마저 단순한 자연 법칙의 산물이라고 쉽사리 믿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프로이트(Singmund Feud, 1856~1939)가 <꿈의 해석(The Interpretation of dreams, 1900)>을 위시한 일련의 저서를 통해 인간의 이성적 능력은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다는 주장을 내놓았을 때 다윈의 이론은 인간의 전 영역에로 확대될 수 있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선을 행하려는 욕구 또는 양심이라는 것도 이성적 선택이거나 타고난 충동이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징벌과 보상에 의하여 후천적으로 습득되어진 것일 뿐이다. 따라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인간의 행동이 어떤 절대적인 원천에서부터 유래한다는 생각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프로이트의 생각도 전적으로 독창적인 것은 아니며 그의 생각이 모두 옳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들은 상당한 과학적 근거를 수반한 것이며, 무의식이 인간의 행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기본적인 주장만큼은 오늘날까지도 폭 넓은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다윈과 프로이트의 이론은 현대 사상의 근간을 과학적인 토대 위에서 대변해 준 최초의 업적일 뿐 현대라는 시대가 그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그들의 이론 가운데 천명된 생각들은 그들과 동시대의 다른 사상가들 및 인접 예술가들에게도 각기 다른 입장에서 다른 방식으로 알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절대적 가치 기준의 상실은 현대 사상의 저류에 깔려 있는 공통적 인식이며 이 인식은 현대라는 시대를 과거의 모든 시대로부터 단절시켜 준다.
<현대의 전통 : 현대문학의 배경(Modern Tradition : Backgrounds of Modern Literature)>의 편자인 엘만(Richard Ellmann)과 페이들슨(Charles Feidelsen)은 이 같은 현대의 전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현대의 전통을 말할 수 있다면 현대의 전통은 역설적이게도 비전통적 전통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모더니즘은 어떤 역사적 단절을 강력하게 함축하고 있다. 그 것은 전해 내려오는 패턴으로부터의 해방이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상실과 거부인 것이다.
If we can postulate a modern tradition, we must add that it is a paradoxically untraditional tradition, Modernism strongly implies some sort of historical discontinuity either a liberation from inherited patterns or, at another extreme, deprivation and disinheritance.

이들은 계속해서 이 같은 해방과 상실이야말로 "반전통 사상으로서의 현대 사상이 가지는 두 얼굴, 곧 긍정의 얼굴과 부정의 얼굴, 또는 살아 있는 현재의 얼굴과 죽어 버린 과거의 얼굴"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현대 사상은 절대적 가치 질서를 신봉하는 기성 관념의 족쇄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 이전까지 엄존해 있던 절대적 가치 질서를 상실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과거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은, 과거의 믿음이 거짓이었다는 전제하에 거짓의 규명을 통한 진실의 획득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현대 사상의 긍정적인 측면이 될 수 있지만, 과거의 믿음이 비록 거짓이었다 해도 그 것이 곧 새로운 믿음에 의해 대체되지 않는 한 믿음의 상실을 뜻하며, 믿음의 상실이란 인간 존재가 무의미한 우주 공간을 표류하게 되는 것을 뜻하게 되므로 이 점은 현대 사상의 부정적인 측면이 된다고 하겠다.
이 같은 긍정과 부정의 공존이 현대 사상의 딜레마라고 할 수 있다. 진실을 손에 쥐어 주면서 구원을 앗아간 현대 사상은 사르트르의 표현대로 현대의 인류에게는 축복이자 동시에 저주인 것이다. 현대 사상의 이 같은 딜레마는 현대 연극에도 첨예하게 반영되어 나타났다. 처음에는 현대 사상의 긍정적인 측면, 곧 기성질서의 허구성에 대한 공박과 그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쪽에 더 시각이 맞추어졌으나 나중에는 특히 양차대전을 겪어나가는 과정에서 현대 사상의 부정적인 측면, 곧 믿음의 상실과 그로 인해 빚어지는 인간의 고독과 불안과 절망이라는 쪽에 더 초점이 맞추어졌다.
이 같은 시각의 변화와 이동은 한 작가의 작품 경력 안에서도 일어나는데, 영미 희곡의 경우 현대 연극의 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는 쇼(Bernard Shaw)와 오닐(Eugene O'Neill)의 경우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것은 외견상 현대 연극에 나타나 보이는 가장 현저한 특질인 다양성의 한 징표이다. 미로의 탐색과도 같은 현대 연극의 다양성은 어쩌면 현대 연극의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현대사상이 인류에게 기성질서의 질곡으로부터의 해방을 가져다주었을 때 인간은 모든 외부적 규율로부터 자유를 얻은 셈이나, 그 자유는 복음이라기 보다 소외(alienation)를 뜻했고 따라서 자유란 새로운 귀속(commitment)에의 탐색을 뜻할 뿐이었다. 브로켓은 그 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따를 수 있고 또 행동의 기초가 되어 줄 수 있는 가치의 체계를 얻기 위한 끈질긴 탐색이야말로 현대라는 시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질의 하나이며 현대 연극에 미친 가장 심대한 영향이다.
The continuing search for a set of values capable of commanding widespread commitment and of serving as a basis for action is one of the major characteristics of the modern era and one of the most pervasive infruences on modern drama

이 인용문에서 브로켓은 가치 체계가 갖추어야 할 두 가지 조건을 암시하고 있는데, 첫째는 인간 행동의 기초가 되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 것이 많은 사람이 따르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곧 가치 체계란 윤리적 행동의 동기가 되는 것인데, 이 것이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믿을 수 있는 보편성(universality)을 지니지 못하고 어느 특정 개인이나 소수집단만이 이해할 수 있고 믿고 비교적(esoteric)인 것이라면 하나의 이데올로기이거나 사적 신앙 형태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인간 행동의 기초가 되면서 동시에 보편성을 지닌 가치 체계란 바로 현대가 잃어 버린 것이자 또 되찾고자 하는 끈질긴 탐구의 대상인 것이다.
드라마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보편적 가치 체계의 상실이란 곧 드라마 자체의 존망의 위기를 뜻할 수 있을 만큼 심각하다. 가치 체계의 붕괴는 행동의 기초를 뜻하는데 행동의 기초가 사라진다는 것은 드라마의 본질이 사라진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이 일체의 가치체계 혹은 도덕적 기준을 잃어 버렸다 하더라도 그 것이 곧 육신의 사망까지를 뜻하는 것은 아닌 만큼 생존을 지탱하기 위한 행동의 여지는 남아 있다. 먹고 배설하고 잠자는 등의 본능적인 행동과 음식물을 획득하고 외부로부터의 위협을 피하여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기초적인 행동의 가능성은 남아 있다. 그러므로 기초적인 인간의 행동을 주 제제로 삼는 드라마의 기본 형식들, 곧 정극과 소극은 현대에도 여전히 쓰여질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가령 어느 드라마의 첫 장면부터 스필버그의 영화에서처럼 긴박감 넘치는 활극이 벌어진다고 하자. 두 사람의 대결이 아무리 아슬아슬한 위기를 넘기면서 처절하게 전개된다고 하더라도 누가 착한 사람이고 누가 나쁜 사람인지가 밝혀지기까지는 충일한 재미를 느낄 수 없을 것이다. 만일 끝까지 두 사람이 싸우는 도덕적 동기가 밝혀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최상의 경우 하나의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것이다. 그 스포츠 경기는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두 팀 간의 경기를 관전하는 것과도 같다. 그렇다면 드라마는 스포츠보다도 재미 없는 것이 되어 버릴  것이고 굳이 존립의 이유를 찾기 어렵게 될 것이다.
이 같이 가장 저차원의 인간행동을 다루는 소극과 정극에 있어서도 인간행동의 배후에는 도덕적 동기가 있어야 드라마가 성립 될 수 있음은 앞의 장에서도 설명했다. 그렇다면 현대인에게서 도덕적 동기를 앗아간 현대사상이 싹트면서 현대의 연극은 어디에서 설 자리를 찾을 수 있는가 하는 심각한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현대사상의 딜레마는 곧 현대 연극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가장 정직한 기반 위에서 보았을 때 현대 연극의 나아갈 길은 없어 보인다. 동기가 사라졌기 때문에 행동은 불가능해지고 행동이 불가능해지므로 연극도 쓰여질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 같이 벼랑에 부딪친 현대 연극은 그 자신의 존립을 위한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그 어느 방향에서도 결정적 만족을 얻지 못한 가운데 여러 갈래의 대안을 내놓게 되었다. 실상 현대 연극이 여러 갈래의 분파로 나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현대 연극의 불만족의 한 징표라고도 할 수 있다. 과거의 연극은 그 종류는 다양하더라도 근본은 하나였다. 고대의 연극, 중세의 연극, 르네상스의 연극, 신고전주의 연극, 낭만주의 연극들은 그들 안에 각기 다른 형태의 연극들은 있었어도 서로를 헐뜯는 연극의 분파는 없었다. 그러나 현대 연극은 불과 100년의 역사 동안에 무수한 분파를 이루어 왔다.
맨 먼저 지적할 수 있는 현대의 갈림은 소위 순수와 통속의 나뉨이다. 대중의 오락을 위한 연극인 통속연극(popular play)의 구분은 물론 현대 이전에도 있었다. 다만 과거의 순수극과 통속극 사이에는 근본적인 괴리는 없었다. 비록 대상에 있어서 순수극은 소수 특권층 내지 지식 계급에 호소했고, 통속극은 일반 대중까지 포함한 전 계급에 호소했다는 점에서 다를 뿐이다. 그러나 이들이 담고 있는 생에 대한 견해에는 차이가 없었다. 전통적인 믿음의 재확인과 그 것의 계속성을 재다짐한다는 테두리 내에서 양자는 똑같다. 다만 순수극은 그 같은 전통족인 믿음을 통속극에서처럼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거나 기정 사실화하는 대신에 거기에 이르기까지 독자적인 사유와 감정적 고뇌를 수반한다는 차이는 있다. 쉽게 표현해서 순수극은 기성가치를 '어렵게' 받아들이는 대신에 통속은 '쉽게' 받아들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순수극의 주인공은 주체적 사고 능력을 가진 인물임에 반하여 통속극의 주인공은 기성적 신념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양자는 모두 우주 안에 절대적 도덕적 질서가 상존한다는 것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같은 전통적 믿음에 대한 회의를 제기한 현대 사상의 대두와 함께 순수극과 통속극의 관계는 동질적인 것에서 대립적인 관계로 변질되게 되었다. 순수극은 현대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현대 연극의 지로를 정직하게 모색해 나간 반면에, 통속극은 현대사상을 회피하는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통속극은 생의 진실을 추구하기 보다 하루 저녁의 오락을 제공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연극이라고 했을 때 통속극이 현대사상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오락의 포기를 뜻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미 여러 차례 설명한 대로 현대사상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인간의 행동에 동기를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이고, 동기가 없이는 행동이 있을 수 없으며, 행동이 없는 연극은 설사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당연히 재미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속극은 생의 진실을 포기하는 대신 행동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통속극은 현대사상을 외면한 채 전통적 믿음을 답습하여 그 안에서 옛날과 같은 행동의 동기를 끌어내어 드라마의 행동을 만들어 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차피 현대사상이란 것을 실상활을 통해서 의식하지도 않으며 연극을 통해 단지 하루 저녁의 위안을 얻으려 할 뿐이므로 현대의 통속극이 설 자리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현대의 통속극은 과거의 통속극과는 중요한 점에서 다르다. 과거의 통속극 작가들은 비록 그들이 생을 피상적으로 그린다 하더라도 그 안에 담긴 전통적 믿음을 진심으로 받들고 있었다. 그래서 과거의 통속극에 등장하는 악인들은 끝에 가서는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거나 아니면 진심으로 죄악을 뉘우치고 회개의 눈물을 흘렸으며 관객도 그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현대의 통속극 작가들은 연극의 행동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부득불 전통적 믿음을 차용했을 뿐 실상은 자신들도 낡은 도덕적 기준을 마음속으로부터 믿는 것은 아니므로 결말에 가서 주인공이 도덕적 설교를 늘어놓는다거나 악인의 회개 따위를 굳이 보여주지는 않는다. 현대의 관객들은 <007> 같은 현대의 통속극을 보면서 신나는 행동을 즐길 뿐이지 선의 승리와 악의 패배라는 결말 따위에 감명을 받지는 않는다. 역설적으로 말해서 현대의 통속극은 가장 도덕적이면서 가장 도덕에 대하여 무관심한 연극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연극을 꾸미기 위해 할 수 없이 낡은 도덕을 밑바탕에 깔면서도 실상은 그런 도덕에 대해서는 털끝만큼의 관심도 두지 않고 그 나머지는 전적으로 신나는 행동을 만들어 보이는 데 단지 이용만 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 순수극은 이와는 정반대임을 알 수 있다. 얼핏 보기에 순수극은 기성 도덕을 전면적으로 거부한다는 면에서 가장 비도덕적인 것 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이 같은 도덕의 부재를 가장 고통스러워 하고 모든 사람이 믿을 수 있는 새로운 도덕적 질서의 회복을 간절히 희구하기 때문에 가장 도덕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앞의 장에서도 말했듯이 순수극의 동기가 통속극의 동기와 다른 것은 아니다. 순수극이 목적으로 하는 것도 통속극과 같이 신나는 행동을 만들어 내어 재미있는 연극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다만 통속극의 경우처럼 낡은 도덕을 그대로 사용하여 가짜의 행동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진심으로 믿을 수 있는 동기에서 비롯된 행동을 만들어 보여주므로서 통속극에서와 같은 공허한 재미가 아니라 폐부에 와닿는 짙은 감동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다. <007>이나 중국무술 영화, 스필버그의 찬탄할 만한 오락영화들은 다채롭고 신기한 행동들로 가득차 있지만 그 것들은 보고 난 뒤에 남는 것은 실상 태풍일과 뒤의 공허감 같은 것밖에는 없다.
이 같이 현대의 연극은 먼저 순수와 통속으로 갈라서게 되었는데 순수 연극 안에서도 진로의 모색 과정에서 그 흐름은 몇 갈래로 나누어 진다. 그 여러 갈래들은 현대 연극의 딜레마에 대한 각기 다른 해답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행동의 동기를 상실했을 때에도 연극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여러 가지의 해답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현대의 순수연극이 택한 몇 가지 진로의 양상을 살펴보아야겠지만 그에 앞서서 현대사상이 현대 연극에 던져준 딜레마가 희곡의 형태에 미친 영향부터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우리는 앞에서 현대의 통속극을 말하면서 그 것이 주로 소극과 정극의 형태에서 활개를 쳤다고 했으나 현대의 순수극은 주로 비극과 희극의 형태와 관련이 깊다. 그런데 현대의 순수극은 비극과 희극의 모습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앞의 장에서 비극과 희극을 설명하면서 희비극 또는 어두운 희극, 흑색 희극이라는 용어를 잠깐 언급하면서 이 같은 중간형태는 특히 현대 연극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말했지만 이제 그 점을 설명할 차례이다.
앞에서 희극을 설명할 때 웃음이란 정상을 이탈한 행동을 보았을 때 유발된다고 했는데, 이 것은 뒤집어 말하자면 정상이란 것이 먼저 전제되어야 정상으로부터의 이탈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희극이 아무리 심하게 그 사회를 풍자하고 헐뜯어도 그 것은 오히려 그 사회안에 정상이라는 것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반증이 된다고 하겠다. 풍자와 해학이 난만한 사회는 건강한 사회라고 말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곧 그 사회가 그 같은 기준에 비추어 보았을 때 심하게 일시적으로 타락해 있다 하더라도 옳은 방향으로 돌이킬 수 있는 가능성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의 문제는 현대 사회의 타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판별할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을 잃어 버렸다는 데 있다. 따라서 현대의 희극작가는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에 부딪히게 되므로 그의 희극은 본의 아니게 심각해지게 되어 비극적 색채를 띄게 되며, 부정적 현실을 그리면서도 그 것이 틀렸다는 확립된 기준이 없기 때문에 그의 희극은 건강한 웃음 대신에 자조적이고 냉소적인 웃음을 유발하게 된다. 이 때문에 현대의 희극을 '어두운 희극' 또는 '흑색희극(dark comedy or black comedy)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현대의 문제는 희극보다 비극에 있어서 훨씬 더 심각성을 드러내 보인다. 희극의 경우는 형태의 변질을 가져왔을 뿐이나 비극의 경우는 비극이 쓰여질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말살된 것처럼 보인다. <희랍극 전집>의 편찬자인 Oates와 O'Neill은 그 책의 서문에서 비극이 성립하기 위한 세 가지 조건을 열거했는데, 첫째, 인간의 존엄성(dignity of man), 둘째, 인간의 자유의지(freedom of his will),셋째, 우주 안에 초자연적인 요인의 존재(existence in the universe of a superhuman factor)를 들었다.
현대에 와서는 이 세 가지 조건의 충족이 모두 어렵게 되었지만 가장 뼈아픈 것은 그 중에서도 위에서 누누이 얘기한 세 번째 조건의 결여라고 할 수 있다. 이 세 번째 조건의 상실로 말미암아 현대의 드라마는 커다란 인간의 행동을 보여주면 보여 줄수록 더욱 더 인간행동의 무의미함을 희화적으로 과장되게 드러내 보일 뿐이다. 따라서 현대의 진지한 연극은 비극이 되기 보다 희극에 가까워지는 경향이 생긴다. 고전 비극에서는 고원한 가치를 위하여 투쟁을 벌이다가 파멸해 가는 주인공의 위대함에서 장엄미(sublimity)를 느끼지만 현대의 순수극에서는 목적을 상실한 무의미한 행동을 벌이는 인간의 왜소함에서 가소로움과 괴기함(grotesqueness)을 느낄 뿐이므로 그 효과는 비극도 아니요 온전한 희극도 아닌 씁쓸한 희극이 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현대에서 비극은 과연 불가능한 것인가? 현대의 희곡문학에서 가장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그 동안의 논의를 잠시 더듬어 볼 필요가 있겠다. 우선 현대에서 비극의 불가능함을 제일 앞장서서 주장한 크러치(Joseph Wood Krutch)에 의하면 "현대의 작품들은 독자에게 실의만을 맛보게 해주는 데 이 것은 고양감과는 정반대의 것이다(Modern works produce in the reader a sense of depression which is the exact opposite of that elation)"라고 말하면서, 그러나 "비극은 근본적으로 절망의 표현이 아니라 절망에 대한 승리의 표현이고 인생의 가치에 대한 신념의 표현이다(Tragedy is essentially an expression, not of despair, but of the triumph over despair and of confidence in the value of human life)"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크러치에 의하면 "비극은 이 세상에서 어떤 정의, 어떤 의미 아니면 최소한 어떤 식별 가능한 질서를 발견하고자 하는 인간의 보편적 욕망을 충족시켜야 한다. 그래서 비극은 인생에 대한 믿음의 긍정이며 설사 신이 하늘에 계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인간만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선언인 것이다(Tragedy should satisfy the universally human desire to find in the world some justice, some meaning of, at least some recognizable order. Hence tragedy is an affirmation of faith in life, a declaration that even if god is not in his Heaven, that at least Man is in his world)"라고 결론 짓는다. 그러면서 크러치는 비극이 성립할 수 있는 조건으로 첫째, 인간영혼의 위대함(soul of man is great)이 전제되어야 하고 둘째, 인간의 복지에 대하여 우주가 관심을 지녀야 한다(universe is concerned about his welfare)라고 했는데 현대는 이 두 가지 조건을 다 갖추고 있지 못하므로 비극이 성립할 수 없다고 진단했다.
한편 스타이너(George Steiner)는 <The Death of Tragedy>라는 저서에서 비극은 유대적(Judaic) 세계관에는 맞지 않으며 근본적으로 헬레니즘적인 것이라고 규정했는데, 가령 구약의 욥기만 하더라도 Job이 아무리 가혹한 고통을 당했다 하더라도 끝에 "하느님의 보상이 따른다면 정의의 실현은 있을지 언정 비극은 될 수 없다(where there is compensation, there is justice, not tragedy)"고 말한다. 같은 이유로 해서 마르크스주의(Marxism) 또한 정의의 이성을 고집하기 때문에 비극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인간에게 일어난 재난의 원인이 일시적인 것이거나 기술적, 사회적 수단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라면 진지한 희곡(serious play)은 될 수 있어도 비극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스타이너에 의하면 '비극은 치유할 수 없는 것(tragedy is irreparable)'으로서 "비극의 주인공은 완전히 이해될 수도 없고 합리적인 분별력으로 극복되어질 수도 없는 세력들에 의해 파괴된다(The tragic personage is broken by forces which can neither be fully understood nor overcome by rational prudence)". 따라서 그에 의하면 비극은 기독교 시대에도 불가능하고 과학과 이성이 지배하는 현대에도 불가능한 것이다.
한편 뮐러(Herbet Muller)는 크러치와 유사한 입장에서 현대에는 "신과 인간의 영광이 사라졌다(The gloy of god and man has departed)"라고 선언하고, 현대인은 "공통의 믿음, 공통의 도덕적 태도, 예술에 대한 공통된 전통을 결여하고 있다( Iacks a common faiths, a common maral attitude, a common tradition in art)"고 비극이 불가능한 구체적 이유로서 아이러니컬하게도 현대인은 "정치적 지적자유의 증대와 함께 실상은 자기네들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따라서 현대인은 사회학적, 심리학적 분석을 위한 실험동물로 전락했다. 인간은 다만 유전과 환경에 의해 결정된 조건반사와 복잡한 심리 기제를 지닌 피조물일 뿐이다(With increased freedom, political and intellectual, he has come to realize that he is not so free. Hence he is merely a guinea pig, and exhibit for sociological or psychological analysis. He is a creature of reflexes and complexes, determined by heredity and environment)"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에서 비극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주장하는 입장을 대변하는 가스너(John Gassner)는 "조건 지어진 동물들의 황량한 공동체 안에 비극은 있을 수 없다. 신경불안 증세와 정신 분열증에 걸린 인간의 고통은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는 있어도 우리의 도덕적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는 없다(There can be no tragic heros in the bleak common wealth of conditioned animals. His writhings in the grip of a neurosis or psychosis may gratify our curiosity but not our morals senses)"는 점을 공감하면서 그러나 "현대에 쓰여지는 비극은 현대적이어야 한다(Tragedy created in modern times must be modern)"고 주장하고 현대 연극의 주요한 특징은 절충주의(eclecticism)로서 "1870년 이후 현대 연극은 미학적 절대주의를 배척했다(Modern theater after 1870 rejected esthetic absolutism)"는 점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따라서 희곡의 장르에 있어서도 비극은 반드시 이래야 한다는 획일적인 요건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개스너는 비극에 있어서 '가치 공동체의 필요(need for a community of values)'를 부인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신의 존재로 보장되는 절대적 가치 질서의 수립이 비극에 있어서 필수적 전제가 됨을 시인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중요한 한 가지 점을 제외한다면 현대의 진지한 희곡들도 고전 비극 못지 않은 가치들을 지니고 있으므로 현대라는 조금은 불만족스러운 접두어를 붙여서 이들을 '현대비극(modern tragedy)'으로 부를 수 있지 않겠느냐는 주장이다. 그러면서 현대 비극의 가치들을 세 가지로 내세우고 있는데 첫째, 이들도 소재에 대하여 곧 인생에 대하여 고도의 진지성(seriousness)을 가지고 접근한다는 것, 둘째 이들 작품은 사회적 심리적 인과(causation)에 의해 인간 행동의 동기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 셋째, 주인공의 파멸을 통해 의미 있는 각성(revelation)을 보여 주려고 애쓴다는 점들을 들고 있다.
개스너는 결론적으로 비극으로서의 성립 여부는 개개의 작품들의 성과 여부에 달린 것이지 극소수의 과거 고전 비극의 모델을 닮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일률적으로 배척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또 어떤 희곡이 반드시 비극이 되어야만 훌륭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반드시 '비극이어야 한다는 꾸밈(tragic pretension)'이 없이도 훌륭한 희곡이 될 수 있는 예로 버나드 쇼의 희극을 들면서 쇼의 희극은 비극이 아니면서도 가치를 능히 다루면서 카타르시스(catharsis)마저 안겨 줄 수 있다고 보았고, 러시아의 체호프의 경우는 비극과 희극의 요소를 '혼합한 극(mixed drama)'이지만 심오한 희곡의 세계를 일구어 냈음을 지적하고 있다. 한마디로 "관객에게 진실로 궁극적으로 문제되는 것은 구체적인 작품의 가치이지 그 작품이 취하고 있는 극 형태가 무엇이냐는 것은 아니다(It is the value of the specific work and not the genre that really and finally matters to the playgoer.)"라고 결론 짓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 본 현대 비극에 관한 논의는 논의의 시비 자체가 중요한 것이라기 보다 현대 연극의 딜레마를 극명하게 반영해 주었다는 데서 일차적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이제 다시 앞으로 돌아서서 현대의 순수 연극의 진로를 살펴볼 차례이다. 인간 행동의 도덕적 동기가 사라졌을 때에도 연극은 가능한가? 만일 가능하다면 어떤 모습으로 가능할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한 해답은 크게 네 가지로 나타났다. <저항의 연극(The atre of Protest)>의 저자인 버스틴(Robert Brustein)의 주장에 기대어 현대 연극의 전개 순서를 따라 설명하자면, 첫째는 전통적 믿음에 입각한 행동을 보여주면서 그 것의 허구성을 통렬하게 공박하는 연극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것은 위에서 말한 현대사상의 긍정적인 측면으로서 드라마의 초점이 기성 질서로부터의 해방에 맞추어진 경우이다. 아직은 현대사상의 부정적인 결과적 측면, 곧 믿음의 상실에 눈뜨기 이전으로서 현대 연극의 초기적 조류를 형성했다. 따라서 이 같은 드라마 속의 인물들은 기성적인 도덕적 기준에 입각하여 행동하며 작가는 그 같은 행동이 얼마나 허구에 찬 것인가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입장을 취한다. 이 같은 연극을 '우상 파괴적(iconclastic)' 연극이라고 버스틴은 이름 붙이고 있다. 이 방향은 현대 연극의 첫 번째 사조인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연극에서 그 구체적 모습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머지 않아 현대의 극작가들은 이 같은 우상 파괴적 연극의 한계를 깨닫게 되었다. 처음에는 기성의 거짓된 질서를 파괴한다는 데서 오는 쾌감과 해방감을 맛보았지만 그 것이 곧 새로운 질서의 수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따라서 충일하고 감동적인 드라마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가짜의 기성 질서를 무너뜨린 위에 진정한 새 질서를 수립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에게 공감을 줄 수 있는 새 도덕적 기준을 찾아내는 일은 단순한 예술적 작업이 아니라 위대한 사상가의 과업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몇몇 야심적인 극작가들은 감동적인 드라마를 쓰기 위한 전제 조건이 될 새로운 사상의 탑을 쌓아 올리는 크나큰 일에 감히 뛰어들었다.
이 같은 연극을 '구세주적(messianic)' 연극이라고 버스틴은 부른다. 구세주적 연극은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의 뒤를 이어 등장한 상징주의와 표현주의 연극, 그리고 1960년대의 제의의 연극에서도 그 구체적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세주적 연극은 한 극작가의 힘으로 실현되기에는 너무나 원대한 포부가 아닐 수 없다. 극작가는 그가 유능한 예술가이자 동시에 예수나 석가나 공자 같은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이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구세주적 연극의 꿈은 잠시 피어오르다가 이내 사라지고 그 꿈이 사라진 터전 위에서 현대 연극은 또 다시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세 번째 진로를 '사회적(social)' 연극이라고 버스틴은 불렀다. 극작가가 인류의 영혼을 구제할 수는 없을 망정 사회의 개선을 위하여 기여할 수 있는 길은 열려져 있지 않겠느냐는, 구세주적 연극보다는 겸손한 태도에서 사회적 연극은 싹틀 수 있었다. 사회적 연극의 등장인물의 동기는 과거의 드라마처럼 내세적 윤리를 지니지 못하지만 적어도 현세적 윤리를 가질 수는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전통적 믿음의 상실이 곧 육신의 사망을 뜻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왜 사느냐에 대한 근본적 이유를 갖지 못하더라도 어차피 주어진 현세의 삶을 낫게 살려는 노력마저 포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비록 내세적 윤리기준이 없다 해도 사회적 정의의 원칙과 현세적 윤리의 기준은 여전히 필요한 것이다. 다만 이 같은 사회정의와 현세 윤리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보다 큰 배후의 도덕적 질서, 내세적 윤리가 비어 있기 때문에 사회적 연극이 우리에게 던져 줄 수 있는 감동은 고전 비극이 당시 관객들에게 주었던 감동의 크기와는 도저히 비교될 수 없는 것이지만, 사회적 연극은 비교적 가치있는 인간의 행동을 다루는 연극임에는 틀림없다는 정도에서 위안을 삼을 수는 있을 것이다. 더구나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엄청난 사회 현실적 문제에 부딪혀 있는 현대 사회에서 사회적 연극의 역할을 결코 과소평가할 일은 아닐 것이다. 이 같은 방향은 극장주의와 서사 연극, 특히 브레히트의 서사극 계열에서 그 두드러진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이제 현대 연극의 네 번째 진로를 버스틴은 '존재론적(existential)' 연극이라고 부른다. 존재론적 연극은 용어 그대로 인간의 존재를 그릴 뿐이지 행동을 그리지는 못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도덕적 동기가 사라졌다고 했을 때 의미 있는 행동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들은 결코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존재론적 연극은 그런 뜻에서 현대사상을 가장 정면에서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연극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연극은 연극이라고 하기 보다 연극의 불가능함을 우위적 상황의 제시를 통해 고통스럽게 그려 보여준다. 그래서 이들의 연극을 처음에는 반 연극(anti-play)이라고 했으며, 또 행동의 연극이라는 말 대신에 '상황의 연극(drama of situation)', 또는 '비행동의 연극(drama of inaction)'이라고도 부른다. 이들은 아무런 의미 있는 행동을 보일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를 주체하지 못하는 인간의 상황을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이 같은 방향은 주로 부조리의 연극에서 그 모습이 첨예하게 드러나 보인다. 베케트(Samuel Beckett)의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에 등장하는 두 인물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곤은 바로 이 같이 갇힌 상황속에서 아무 의미 있는 행동을 해보일 수 없는 현대인의 상징적 축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존재론적 연극은 한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에 희곡의 구성도 직선적 구조(linear structure)가 아니라 항상 처음과 끝이 같은 원형적 구조(circular structure)를 지닐 수밖에 없다.
이제 끝으로 현대 연극의 마지막이자 다섯 번째 진로를 말할 차례이다. 위에서 인용한 버스틴은 네 번째까지만 언급했으나 저자는 이 책에서 다섯 번째 진로로 '미학적(esthetic)' 연극의 방향을 추가하고자 한다. 미학적 연극의 원류는 지난 세기말 대륙의 영향을 받아 한때 유미주의(estheticism)를 유행케 했던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의 연극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미주의는 기성 도덕을 전면적으로 배격한다는 점에서 절대적 가치 질서의 상실이라는 현대사상에 입각해 있으면서도 현대인의 삶의 문제와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탐미적 환상의 세계로 도피하는 길을 택했다. 이 같은 유미주의 도피주의(escapiasm)적 경향은 기성도덕에 대한 방항적 몸부림으로 한때의 지적 유행으로 그쳤으며 '우상 파괴적 연극'의 한가닥으로 이해할 수 있을 지언정 현대 연극의 새로운 방향으로 자리매김하기에는 미치지 못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미학적 연극은 유미주의의 연극처럼 일체의 도덕적 암시(moral implication)를 떨쳐 버리고 연극 속에서 오직 미학적 쾌감(esthetic pleasure)을 추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연극을 뜻한다. 다만 유미주의의 연극이 기성 도덕에 대한 위악적 반항의 몸짓으로 초도덕성(amorality)추구했다면 1970년대 이후에 등장한 미학적 연극은 처음부터 도덕을 의식조차 하지 않는다. 도덕을 운위하는 것 자체를 촌스럽게 여기는 이 새로운 시대 사조를 흔히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부르는데 1970년대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이들 연극의 성향은 매우 다양해서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우나 1960년대에 치열하게 대두했던 전위연극 또는 실험연극의 연장선상에서 논의할 수 있다.
이들을 전위(avat-garde)나 실험(experimental)연극이라고 부르기보다는 기성 연극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연극이라는 뜻에서 대안연극(alternative theatre)이라고 부르는데 60년대의 대안연극은 70년대로 접어들면서 의미심장한 변화를 수반하게 된다. 물론 이들 연극 또한 다양하기 그지없으나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들 대안연극의 밑바탕에는 뚜렷한 공통점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우선 탈냉전시대의 도래와 함께 급진적 좌파세력이 몰락하면서 70년대의 대안연극은 사회참여적 성향을 버리고 보다 더 미학적인 세계로 침잠해 들어간다. 이 같은은 변화는 1970년대에 이르면 민권문제 등에 있어서 상당한 승리가 쟁취되었고 월남전이 마침내 종식되므로서 사회투쟁의 예봉이 한풀 꺾인 시대적 변화에 발맞춘 것이다. 이로서 과격하고 급진적이고 투쟁적인 구호는 대부분 사라지고 온건하고 사색적이고 구도적인 내적 탐구로 대안연극의 관심이 옮겨간다. 소위 '억제된 형식주의(restrained formalism)'라고 표현되는 신 형식주의의 추구로 바뀌어진 이들의 관심은 어느 때 보다도 더욱 내용보다는 형식 또는 구조에 모여진다. 그래서 70년대 이후의 대안연극을 가리켜 연극이라는 말 보다는 보다 더 탄력성이 있는 '퍼포먼스(performance art)'라는 말로 부르게 되었다.
여기서 퍼포먼스라는 말은 결코 새로운 말은 아니다. 퍼포먼스라면 전통적인 의미에서 희곡 텍스트(dramatic text)가 무대 언어로 전환되었을 때 이를 가리켜 '공연'이라고 부르는 것을 뜻하지만 70년대 이후의 대안연극에 대하여 퍼포먼스라고 할 때의 의미는 문학적 연극(literrary drama)에 대항하는 말로 전통적 의미의 전달체계를 부정하며 희곡텍스트에 의존하지 않고 그 자체로서 독자적 예술형식(autonomous art form)으로 군림하게 된다. 따라서 퍼포먼스에는 종전의 희곡작가가 설 자리는 없으며 연출가가 작가 겸 연출(author-director)의 역할을 도맡으며 당연히 언어보다는 시청각적 요소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이미 60년대의 대안연극에서부터 나타난 연출가의 쿠데타가 더욱 확연히 모습을 드러낸 셈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를 총체적으로 표현하여 소위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시대라고 하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생소한 말이 아니게끔 되었다. 그러면서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만큼 폭 넓게 사용되면서 정의 내리기 어려운 낱말도 없을 것이다. 포스트라는 말은 물론 '이후'라는 뜻으로 포스트모더니즘하면 모더니즘(Modernism)에 대응하는 말인데 모더니즘은 대체로 20세기 전반까지의 문학과 예술일반의 경향 또는 사조를 가리키는 용어이며 연극에서는 흔히 쓰여지는 말은 아니나 반사실주의(Anti-realism) 연극을 통칭하는 의미로 이해하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문학일반 특히 문학비평에서 말하는 모더니즘은 사실주의 이후 사실주의에 대항하는 새로운 경향의 문학을 지칭하는 용어이므로 반사실주의 연극이 곧 연극에서의 모더니즘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모더니즘이 사실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싹텄듯이 포스트모더니즘 또한 모더니즘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되었다고 도식화하기는 어렵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실상 모더니즘보다는 사실주의에 대한 더 근원적인 반발에서부터 싹 텄기 대문에 모더니즘과 동일한 적을 가지고 있으며 그런 뜻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연장이면서 동시에 단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절의 측면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을 처음 쓴 하우(Irbing Howe)가 모더니즘의 "고고하고 오만하고 비교적(highbrow, arrogant & esoteric)측면"의 사멸을 칭송한 데서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한마디로 20세기 후반을 지배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가장 핵심적이고 일반적 용어로 문학과 예술을 포함하는 문예적 개념이자 시대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다원성과 상대성, 그리고 비결정성을 강조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본정신에 비추어 이를 지나치게 체계적 이론으로 파악하는 시도는 자칫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세계 2차대전 직후 미국에서 팽배했던 희망과 낙관주의가 점차 절망과 비관주의로 채색되기 시작하면서 태동하기 시작한 포스트모더니즘이 본격적인 문학용어로 도입된 것은 1960년대부터였으며 이제는 국경을 초월하여 전세계적인 현상으로 자리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먼저 비슷한 시기인 1960년대에 등장한 문학비평이론인 포스트구조주의(Post-structuralism)에 대하여 설명할 필요가 있다. 포스트구조주의는 실상 문학비평이론이기에 앞서 철학사상이며 1960년대 이후 대두한 거의 모든 사상과 이론을 포용하는 방대한 관념의 체계이지만 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하여 가장 핵심적인 이론은 소위 해체주의(theory of deconstruction)로 불리는 데리다(Jacques Derrida)의 철학이론과 이를 문학연구에 접목시킨 미국 트로스(Levi-Stauss)로 대표되는 구조주의(Structuralism)에 대응되는 용어인데 구조주의가 언어에 있어서 기표(signifier, 또는 지시어)와 기의(signified, 또는 지시대상) 사이의 관계가 필연적이 아니라 임의적이라는 것(곧 사과라는 말과 나무에 매달린 사과 사이에 필연적 관계가 없다는 뜻)까지는 인정하면서도 언어의 재현(representation)가능성을 믿었던 낙관주의에 근거했으나 역시 포스트구조주의는 기호란 더 이상 확실한 것이 아니며 의미 역시 유동적이고 일시적으로 유보된 것이며 따라서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이을 수 없는 단절이 있다고 보았다.
언어를 포함한 모든 기호의 재현능력과 지칭하는 대상의 현존(prescence)마저 부정하므로서 서구 형이상학의 이성중심주의(loglcentrism)를 근저에서부터 허물어뜨린 데리다는 우리가 현존한다고 생각하는 의미의 센터(또는 transcentental signified, origin, God 또는 Being 등의 말로 바꾸어 쓸 수 있다.)나 절대적 진리 모두가 "환각이요, 흔적이요, 대체물(illusion, trace, substitute)일 뿐이다"라고 주장한다. 이 같이 언어의 지시적 기능에 대하여 극단적인 회의주의에 빠진 포스트구조주의는 인간주체나 개별적 자아에 대하여도 회의를 품게 되고 합리적 이성을 소유한 인간의 주체성이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멸되었다고 보고 문학작품에 있어서 '저자의 죽음'을 선고하기에 이른다. 나아가 추상적 체계성과 총체성을 거부하며 극단적 상대주의를 추구하여 작고 국부적이고 파편적인 것을 옹호한다.
그러나 데리다가 말하는 해체주의는 파괴가 아니라 닫힌 체계에 대한 저항이며 불안정과 무질서를 포용하며 다양성과 열림을 추구하는 지적 탐색이다. 이는 곧, "니체적 긍정, 즉 세계의 유희에 대한 유쾌한 긍정, 활발한 해석이 가능하며 흠도 없고 진실도 없고 오리진도 없는 세계에 대한 긍정"을 뜻하며 모더니즘에서 보이는 것처럼 부재하는 센터의 상실감으로 인하여 향수와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 더 이상 센터를 추구하지도 않고 대범히 센터의 부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자는 태도를 말하며 바로 이 것이 포스트구조주의의 포스트모더니즘적 측면인 것이다.
여기서 해체의 전략은 텍스트 속에 억압된 무의식의 차원을 밝혀내서 텍스트의 의미가 얼마나 가변적이고 불안정한가를 보여주므로서 모든 텍스트의 의미는 고정불변한 상태가 아니라 개방적인 상태로 남아있어서 독자의 마음속에 다양한 의미작용의 유희를 유발시키고자 하는 데 있다. 이로서 텍스트와 독자 사이의 역동적 관계가 형성되며 독자는 고정된 의미를 소비하는 대신 의미의 생산자로서 '창조적 오독'을 권장 받는다. 1970년대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새로운 비평방법인 독자반응비평(reader response criticism)도 이로부터 무시 못할 영향을 받았다. 모든 대상은 우리가 그 것을 우리의 의식에 기록할 때에만 비로서 존재한다는 현상학의 이론을 문학에 적용하여 문학작품의 의미는 인쇄된 지면에 있지 않고 오직 독자의 의식에만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객관적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고 오직 그 것에 대한 해석만이 존재한다는 니체의 주장과 연장선상에 놓인 이 같은 문학비평의 태도는 이 세상에서 어느 것도 확실히 알 수 없다는 극단적 회의주의의 산물이며 이는 앞서 말한 대로 포스트구조주의의 출발점인 것이다.
그러나 실상 포스트구조주의는 출발부터 세계에 대한 철학적 인식이었듯이 엄밀한 의미에서 문학비평 방법이라고는 보기 어려운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하나의 사조로서도 포스트구조주의는 극단적으로 표현하여 셀든(Raman Selden)의 말대로 '완전한 재현의 가능성, 기호의 완전한 지시기능, 그리고 절대적 의미의 현존을 믿지 않기 때문에 실패를 전제로 한 숙명을 타고났다'고 볼 수 있으며 영(Robert Young)의 말을 빌리자면 "포스트구조주의라는 말 제체가 그 강조점을 단일 의미나 이론으로부터 시공을 넘나드는 무한한 운동으로 옮겨가고 있는데 이는 이 세상에는 어떠한 명확한 포스트구조주의의 이론도 있지 않으며 있을 수도 없다는 것을 뜻한다(The word post-structuralism itself shifts the emphasis from any single meaning or theory towards an unbound movement through time and space, suggesting that there will never be, and can never be, any definitive 'theory of poststructuralism')". 심지어 1990년대에 이르러 포스트구조주의는 소멸했다는 주장마저 제기되고 있으나 앞에서 말했듯이 포스트구조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적 근간을 이루고 있으며 아래에 설명하고자 하는 포스트구조주의에서부터 발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논의하고자 하는 현대 연극의 진로 가운데 하나인 미학적 연극과 특히 관련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요 특성들을 살펴보자면 첫째, 상호 텍스트성(inter-textuality)을 들 수 있다. '모든 텍스트는 어디까지나 다른 텍스트들을 흡수하고 그 것들을 변형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의 말에서 처음 제기된 상호 텍스트성의 개념은 패러디(parody)에서 가장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패러디는 기존의 형식과 같은 꼴을 취하면서 전혀 다른 얘기를 하는 문학적 장치로서 지금까지 세워진 진리가 허구임을 드러내 보인다. 다만 패로디의 경우처럼 주어진 텍스트 안에 다른 텍스트가 인용문이나 언급의 형태로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제한적인 경우 뿐 아니라 어느 한 텍스트가 한 문화의 다양한 언어나 의미의 행위와 맺고 있는 관계에 이르기까지 폭 넓게 사용된다. 이는 독창성(originality)을 전혀 미덕으로 생각하지 않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두드러진 징후로 이제 작가들은 남의 글을 다시 고쳐 쓴다는 생각으로 글 쓰기에 임하게 되었으며 예술작품들은 '기록 보관소'처럼 그 것들이 속한 공동체의 공유재산화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자기 반영성(self-reflection)또는 자의식(self-consciouness)을 들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사실주의와는 달리 자연이나 우주 또는 삶의 실재에 대하여 근원적인 회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실제 세계와 이의 재현 보다는 창조된 세계를 보다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통념적으로 예술이란 셰익스피어의 말대로 자연에 거울을 비추는 것이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예술은 자연이란 외부세계가 아니라 바로 그 자신, 곧 내부세계를 향하여 거울을 비추는 자의식적 특성을 드러낸다. 객관적 외부 현실을 반영하기 보다 예술이 그 자신을 반영하는 경향은 예술창작에서 일찍부터 있어 왔으며 모더니즘의 예술에서도 중요한 요소를 이루었으나 그 것이 핵심적인 지배소로 등장한 것은 소위 메타픽션(metafiction), 메타드라마(metadrama) 등의 용어가 알려지기 시작한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러서이다. 여기에 메타는 '뒤'라는 의미로 메타라는 접두어가 붙은 이들 용어의 의미는 어느 한 문학 텍스트가 텍스트밖에 존재하는 다른 세계를 반영하거나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그 자체를 반영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창작의 결과 보다는 과정이 중요시 되며 이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을 가리켜 예술을 통하여 예술적 자위행위의 희열에 탐닉하는 자들이라는 비판이 가해지기도 한다.
셋째,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 가운데 하나가 곧 예술의 탈 장르화 또는 장르의 확산이다. 문학 장르 그리고 예술 장르 사이의 다른 장르와 엄격히 구분하는 일 자체가 거의 불가능해 졌다. 이 같이 경계선을 넘고 간격을 좁히는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면서 각 장르끼리의 혼합과 결합이 일어난다. 가장 거리가 멀 게 느껴져 왔던 창작과 비평 사이의 관계 마저 유동적이 되어 창작을 닮은 비평이 나오고 비평을 닮은 창작이 쓰여지기도 한다. 특히 포스트구조주의에 이르러는 비평이 더 이상 문학작품의 시녀이기를 거부하고 자족적 장르로서 제 2 의 창작임을 선언한다. 장르의 파괴 또는 확산은 퍼포먼스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퍼포먼스는 연극 뿐 아니라 음악, 무용, 미술, 영화, 비디오, 건축 등 다양한 장르가 고루 혼합되어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네 번째 특징은 대중문화에 대한 지대한 관심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실상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이 처음으로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도 다름 아닌 대중문화와의 관련성에서였으며 지금까지도 대중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인하여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사이의 간격은 어느 때 보다 좁혀져 그 동안 억압되어 왔던 것의 복귀현상이 일어났는데 이는 가부장제적 모든 권위와 힘이 상실되면서 그 권위 아래서 억압 받아 온 주변적인 것들이 세력을 회복할 수 있는 정신적 풍토를 마련해 준 포스트구조주의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우리는 이상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요 특성들을 살펴보았는데 이 같은 특성들은 70년대 이후의 퍼포먼스에도 고스란히 드러나 보이는 특성들이다. 그리고 상당부분은 이미 앞에서 논의한 60년대의 대안연극들에서부터 발아했다. 그러나 60년대의 대안연극과 70년대의 퍼포먼스 사이에는 앞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외향적 연극에서 내향적 연극으로의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겉보기에도 마랑카(Bonnie Marranca)가 지적한 대로 협동(collaborative)작업에서 개인(individual)창작으로, 환경적 공간(environmental space)으로부터 정신적 공간(mental space)으로, 그리고 서술(narration)적 구성에서 기록(documentation)적 구성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60년대의 대안연극이 지녔던 전투적 사회 참여적 성향이 불식되었는데 이는 휴벨(Michael Vanden Heuvel)이 <Performing Drama / Dramatizing Performance>에서 갈파했듯이 "전후시대의 특징을 이루었던 상실과 소외감에 대한 치료를 공연을 통해 찾으려는 순진한 꿈(naive dream of discovering in performance a cure for the sense of loss and alienation that characterized the postwar period)"에서 마침내 깨어난 데서 비롯된다. 제의의 형식을 빌린 "공연의 치료적 기능(therapeutic function of performance)"을 신봉한 60년대의 대안연극이 "센터의 현존"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한 구세주적 사명감으로 인해서 70년대의 퍼포먼스와의 여러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사회적' 연극으로 분류하였으며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조에 포함시킬 수 없다고 본다. 바로 이런 뜻에서 휴벨은 퍼포먼스를 정의하여 "퍼포먼스란 현존 또는 힘의 제거이며 부재와 무력함의 긍정이다(Performance is the displacement of presence, of power, and the affirmation of Absence and powerlessness)."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 같은 퍼포먼스의 미학적 방향은 70년대 이후 연극의 주요 흐름을 형성해 왔으나 관객의 이해와 공감을 가로막는 난해성의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고 이는 21세기 연극이 풀어가야 할 과제로 남게 되었다.
 

  위로 올라 갑니다.

 Minjung Theatre Company

  

   □처음으로인사드림

   
□극단소개 공연연보

   □성균관대 공연영상문화연구소 Home

   □성균관대 공연영상문화연구소

  □공연예술저널 4호

  □전국의 연극관련 대학 링크

  전국의극단,극장,연극관련기관 링크 

  알림판 

   □자유게시판

       
      연극의 이해

      제 1 부 희곡과 공연의 이해 : 정진수
 

    1. 희곡과 공연의 특성.........................9   

    2. 희곡과 공연의 본질.........................17

    3. 희곡의 요소....................................36  

    4. 희곡의 형태....................................51  

    5. 희곡과 공연의 양식..........................60  

    6. 공연의 요소.....................................66  

    7. 희곡과 공연의 비평..........................90  

    8. 현대연극의 의미..............................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