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njung Theatre Company

 

    

연극의 이해   
Understanding Drama & Theatre
정진수 / 김동욱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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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의 이해

      제 1 부 희곡과 공연의 이해 : 정진수
 

    1. 희곡과 공연의 특성.........................9   

    2. 희곡과 공연의 본질.........................17

    3. 희곡의 요소....................................36  

    4. 희곡의 형태....................................51  

    5. 희곡과 공연의 양식..........................60  

    6. 공연의 요소.....................................66  

    7. 희곡과 공연의 비평..........................90  

    8. 현대연극의 의미..............................103  
 

       제 1 부 희곡과 공연의 이해 : 정진수

    1. 희곡과 공연의 특성.........................9

    2. 희곡과 공연의 본질.........................17

    3. 희곡의 요소....................................36

    4. 희곡의 형태....................................51

    5. 희곡과 공연의 양식..........................60

    6. 공연의 요소.....................................66

    7. 희곡과 공연의 비평..........................90

    8. 현대연극의 의미..............................103
 

                                     2. 희곡과 공연의 본질

 
희곡 또한 예술의 한 분야라고 했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예술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부딪히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예술이란 단어만큼 개념 정의가 어려운 말도 흔치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예술이라는 단어를 정의 내리는 일 자체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지 모르겠다. "예술은 규범에 항거한다(Art resists formula)" 라는 말이 있듯이 예술은 어떠한 하나의 정의에 포박당하기를 거부한다. 어느 탁월한 이론가가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완벽하게 설명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벌써 그 설명에 위배되는 예술 작품이 어디선가 만들어 지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고 보아도 좋을만큼 예술은 규범의 틀에 갇히기를 거부하므로 독자의 생명을 지닌 유기체로 파악되어야 한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서 예술에 대한 설명이 달라지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예술의 영어 단어인 'art'는 원래 예술 뿐 아니라 모든 기술 분야까지 총칭하는 말이었다. 18세기까지 'art'의 의미는 소기의 결과를 도출해 내기 위하여 지식이나 기능을 체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었다(a systematic application of knowledge or skill to achieve a desired result). 오늘날에도 'art' 는 그런 의미까지 포함하는데 가령 의술을 가리켜 'medicine' 이라고 하는 경우가 그 예이다. 그래서 18세기에 이 같은 기술과 구별하여 예술을 'Fine or Beautiful Arts'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거의 같은 무렵에 순수예술은 천재의 산물로서 창작의 원리는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신비의 베일에 싸인 것으로 보는 견해가 대두했다. 이 같은 낭만주의적 사고는 예술이 지식이나 기술의 체계적 적용이라는 종전의 생각과는 정면으로 상치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 같이 예술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일은 시대에 따라 다를 뿐 아니라 절대적으로 만족스러운 설명 자체를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예술이 무엇인가를 적극적으로 설명해 내기란 불가능한 일이라 하더라도 소극적인 설명은 오히려 시사적일 수 있다. 곧 예술이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던지기 보다 예술은 무엇이 아닌가라는 질문을 통해서 우리는 오히려 예술의 핵심에 접근해 갈 수 있어 보인다. 예술에 반대되는 말로서 우리는 흔히 인생(life), 현실(realiity),혹은 자연(nature)이란 말을 사용한다. 다시 말해서 예술이 무엇인지는 석연치 않아도 적어도 예술은 인생이 아니고 현실이 아니며 자연이 아닌 것이다. 인생, 현실, 자연, 이 세 가지는 다 인간의 손이 미치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것' 이며 이 것들은 그 안에 목적이나 의식이나 질서를 가지지 않는, 의미 이전의 상태에 있다. "인생에 기성적인 의미는 없다(Life does not come equipped with meaning)"는 말이 있듯이 현실 또는 자연이란 것도 본래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없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예술이란 인간의 손에 의하여 빚어진 것이며 그 안에는 인간이 부여한 의도와 질서와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생과 현실과 자연은 예술과 대립되는 말들이다. 그렇다면 인생과 현실과 자연은 예술 창조에 있어서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예술 창조 행위를 예술가의 미적 감흥을 감상자에게 전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예술행위가 발생하기 위해서 우리는 두 개의 단계를 상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첫째, 예술가의 미적 감흥의 발생이라는 단계와 둘째, 예술가의 내면에서 일어난 감흥을 감상자에게 전달하는 단계가 그 것이다.
먼저 첫 번째 단계를 생각해 볼 때 예술가가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 미적 감흥을 일으킬 수는 없다. 그는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라도 그 자신의 경험세계 속에서 창조적 충동(creative impulse)을 느끼게 된다. 이 같은 영감의 원천(source of inspiration)이 바로 인생과 현실과 자연이다. 따라서 인생과 현실과 자연은 예술가의 소재(subject-matter)가 되는 것이다.
이제 두 번째 단계로 예술가는 자기 내면에 일어난 미적 감흥을 감상자에게 전달해야 하는데 미적 감흥이란 실체가 없는 무형의 것이므로 직접적인 전달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예술가는 전달의 형식 또는 매개체(medium)를 필요로 한다. 곧 예술가는 자기의 생각이나 느낌을 언어적 또는 시청각적 기호로 바꾸어 감상자에게 전달할 수밖에 없고 감상자는 예술가의 기호를 해석해 낼 수 있어야 한다. 이 때 감상자는 그 자신의 인생과 현실과 자연에 대한 경험을 토대로 하여 예술가의 기호를 해석하게 된다. 따라서 인생과 현실과 자연은 예술 감상의 지표(point of reference)가 되는 셈이다.
이 같이 예술은 인생과 현실과 자연과는 대립되는 것이지만 후자는 예술 창작의 소재가 되며 예술 감상의 지표가 되기 때문에 양자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음악과 같이 고도의 추상적인 예술에 있어서도 자연의 음향은 작가에게 영감의 원천을 제공해 주며 감상자에게는 감상의 지표가 되어 줌은 말할 필요도 없겠다. 그러나 모든 예술 가운데 연극은 가장 '인생의 모습을 닮은(life-like)' 예술이기 때문에 연극에 있어서 예술과 인생의 관계는 가장 미묘하다. 시나 소설은 언어를 매체로 하고, 음악은 소리를, 그림은 시각을 매체로 하지만 연극은 모든 매체를 동원하기 때문에 흔히 연극을 가리켜 종합예술(synthetic art)이라고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흔히 연극은 외견상 인생과 혼동을 일으키기 쉽다. 특히 어린애들이나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이 드라마를 현실과 혼동하는 일이 자주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연극속에 몰입해서 주인공과 자기를 동일시(identification)하고 마치 자신이 주인공인 양 그의 운명의 변전에 따라 같이 울고 웃고 정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무대 위에서 필쳐지는 일들은 현실이 아니라 허구(fiction)에 지나지 않음을 냉철하게 의식하게 해주는 미적 거리(aesthetic distance)를 유지할 수 있으려면 어느 정도의 관극 훈련과 문화적인 교육 과정이 필요하다. 무대 위의 사건이 거짓인 줄 뻔히 알면서도 그 안에 빠져 들어가고 정감을 느끼는 관극심리를 가리켜 영국의 낭만 시인인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는 '불신의 고의적 유보(willing suspension of disbelief)'라고 표현했지만 훈련된 관객조차도 어느 순간에는 무대 위의 사건을 현실로 착각할 만큼 연극이 인생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한 것만은 틀림없다.
관객이 연극을 감상하는 태도에 있어서도 인생을 살아가는 태도와 매우 유사하다. 가령 거리에서 두 사람이 다투는 광경을 행인들이 구경할 때에 그들은 저마다 보고 싶은 쪽을 선택해서 바라보고 두 사람 중 누가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것도 각자의 판단에 따라서 한다. 관객이 연극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관객은 등장인물들의 말을 모두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의 인생체험에 입각하여 자유롭게 판단한다. 등장인물의 마음 속 깊은 곳까지를 작가 독자들에게 친절히 설명해 주는 소설과는 감상양식이 아주 다르다. 그래서 연극을 가장 '객관적인 예술(objective art)'이라고 말한다. 연극 관객은 작가가 떠 먹여주는 타율적 감상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체험에 견주어 주체적으로 감상한다. 그렇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연극의 효과(impact)는 한층 커진다. 왜냐하면 비록 작가가 은연중에 선동했다 해도 관객은 연극을 보고 내린 결론이 스스로의 판단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연극에서 얻은 결론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 의지마저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 같이 연극은 그 전달의 형식과 감상 양식에서 모두 인생의 모습을 닮긴 했어도 연극이 곧 인생일 수는 없다. 그 것은 연극이 허구의 인물을 가지고 허구의 사건을 만들어 보여주기 때문만은 아니다. 연극이 실존 인물을 소재로 하여 그의 행적을 사적으로 충실하게 재현해 낸다고 해도 그 연극은 전면적인 진실이 아니라 일면적인 진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극작가는 그 인물에 관한 숱한 기록들 가운데 그 인물에 관한 극작가 자신의 '주관적 해석'에 들어맞는 기록만을 선택해서 그린다. 따라서 극작가는 실존인물을 그린다기 보다 그 실존인물에 관한 자신의 주관적 해석을 그린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여기서 실존인물이 '있는 그대로의' 곧 객관적인 인생 또는 현실 혹은 자연이라고 한다면, 희곡을 통해 그려진 인물은 극작가에 의하여 '인위적' 으로 다시 말해서 주관적으로 처리된 예술 작품인 것이다.
이제 손 쉬운 예로서 한 송이의 꽃을 화폭에 담는 화가의 경우를 들어보기로 하자. 이 화가는 어느 날 산책길에서 우연히 이 꽃을 발견하고 매우 아름답다고 느끼고 그래서 이 꽃을 화폭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다시 말해서 화가는 자연을 관찰하고 그 경험에서 아름답다는 감흥을 느꼈으며 그 감흥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켰고 그래서 그림이라는 매체를 통하여 자신의 느낌을 남에게 전달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물론 이 꽃을 바라본 사람이라면 대체적으로 누구나 아름답다고 느낄지 모른다. 그러니까 이 화가가 꽃을 보고 느낀 감흥은 각별히 독창적이거나 심오한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이 아름답다는 소박한 느낌은 화가의 마음 속에서 일어난 것이지 그 꽃 자체의 고유 성질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꽃은 비록 생명체이긴 하나 자신의 아름다움에 대한 자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미모를 뽐내려고 피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꽃은 아름답건 추하건 간에 아무런 기성적인 의미를 그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움은 꽃의 성질이 아니라 화가가 그 꽃에 부여한 의미인 것이다. 따라서 이 화가가 꽃을 화폭에 담는다고 했을 때 있는 그대로의 꽃을 아무리 사실적으로 그리려고 하더라도 그는 아름답다는 그 자신의 주관적 인상을 그리는 것이지 결코 꽃의 표본을 수집하는 식물학자의 경우처럼 꽃 자체를 모사 내지는 기록하려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화가는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무의식중에라도 몇 가지 중요한 인위적인 혹은 의도적인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는 우선 그 꽃나무 밑에 떨어져 있는 휴지와 담배꽁초 같은 것은 생략할 것이며, 꽃의 고르지 못한 색조는 보다 탐스럽게 보이도록 그릴 것이고,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운 가지는 균형있게 보이도록 그릴 것이다. 한마디로 그 화가는 꽃을 그리는 과정에서 아름답다는 그 자신의 주관적인 느낌을 뒷받침하도록 선택(select)하고 강조(emphasize)하고 재배열(rearrange)하게 될 것이다. 그는 무의미한 자연에 대하여 선택과 강조와 재배열이라는 인위적인 처리를 가함으로서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따라서 예술이란 해석된 자연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과정은 희곡 작가에게 있어서도 다를 바가 없다. 연극의 겉모습이 아무리 인생을 닮았다 해도 연극 무대 위의 인생은 극작가의 인생에 대한 그 나름의 해석에 맞도록 선택되고 강조되고 재배열된 인생일 뿐이다. 가령 햄릿이 "살아야 하느냐 죽어야 하느냐, 그 것이 문제로다..." 로 시작되는 유명한 독백을 하는 장면이 연극속이 아니라 실제 인생이라고 한다면, 그 숙연한 내면 성찰을 하는 순간에 인간 햄릿은 우연히도 방귀를 뀌어 댈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인간의 생리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극 안에서 셰익스피어는 햄릿의 영적인 고뇌를 선택적으로 그리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그 같은 생리적인 묘사를 결코 그 장면에서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부조리극의 극작가라면 그 같은 인간의 희비극적(serio-comic)인 면이야 말로 인생의 진실이라고 보고 그 같은 묘사를 일부러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것은 부조리 극작가들의 인생에 대한 해석이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라면 부조리의 극작가는 햄릿을 마치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의 인물들처럼 일관되게 어릿광대처럼 그려나가야 하는 것이지 유독 그 장면에서만 방귀를 뀌어대도록 허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모든 예술에서와 마찬가지로 극작가도 그의 작품안에 인생의 전모를 담을 수는 없다. 때로 그는 구도자와도 같이 인생의 절대적 혹은 궁극적인 진실을 손에 쥐기 위하여 애쓰더라도 필연적으로 인생의 부분적인 묘사에 의해 그 것을 전달하지 않을 수 없다. 위에 예를 든 화가의 경우도 아름다움이라는 일반적인 느낌을 구체적인 한 송이의 꽃을 통해서 전달하면서 그 것도 꽃의 객관적인 묘사가 아니라 선택되고 강조되고 재배열된 주관적 묘사에 의해 전달되고 있다. 설사 그 화가가 추상 화가라 하더라도 그는 구체적인 선과 색과 매스(mass)를 사용해서 그의 의도를 전달해야지 이 세상의 모든 선과 색과 형태를 하나의 화폭에 담을 수는 없을 걳이다.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 호소력을 지닌 것으로 평가되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작품도 개성적인 인물과 특수한 플롯과 독창적인 언어로 가득 차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흔히 역사는 구체성(particularity)을 통해서 개별적 진실을 추구하고, 철학은 일반성(generality)을 통해서 보편성(universality)을 추구하는 반면에, 문학과 예술은 구체성을 통해서 보편성을 추구한다고 말하는데 희곡과 연극도 예외는 아니다. 다시 화가의 예를 든다면 한 송이의 꽃이라는 구체적인 사물을 통하여 아름다움이라는 보편적 진실을 얻어내는 것이 예술의 일반적인 원리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위에서 말했듯이 아름다움이란 보편적인 진실이기 때문에 감상자들의 공감을 얻어낼 수 있는 것이지만 이 아름다움이 그 꽃에 관한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진실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해 두어야겠다. 어쩌면 아름다움은 그 꽃에 관한 가장 중요한 진실일지 모르나 화가에 따라서는 똑같은 꽃에 대하여 외로움, 기쁨, 희망 또는 심지어 추악함이라는 전혀 다른 그러면서도 여전히 보편성 있는 진실을 찾아내어 감상자들을 성공적으로 설득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앞에서 'drama' 와 'theater'의 어의상의 차이를 설명했지만 실상 희곡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드라마란 무엇인가라는 말로 대체되어야 한다. 우리말의 희곡은 문학의 한 형식을 지칭하는 말로 들리기 때문에 희곡의 본질을 논하는 이 자리에서는 희곡이란 말 대신에 드라마라는 영어의 음역을 사용하는 것이 나으리라고 보며 앞으로도 문맥에 따라 희곡이라는 말 대신에 드라마 쪽을 택하게 될 경우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먼저 예술을 정의하면서 소극적인 방법을 택했듯이 드라마를 정의할 때에도 우선 소극적인 정의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드라마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그 것은 소설에서 사용하는 서술(narration)이다. 어떤 사건(event)을 전달하려 할 때 서술의 방법을 택한다는 것은 한 사람의 화자가 사건의 모든 경위를 말로 표현한다는 것을 뜻하며 드라마의 방법을 택한다는 것은 그 사건을 '실제행동으로 연기(enactment)'해 보인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드라마의 그리스어 어원이 'to do' 혹은 'to act'에서 나온 것임을 새삼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곧 드라마는 서술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 보여 주는 것임을 말한다.
드라마가 무엇인가를, 가장 간결하게 정의한 사람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는 드라마를 '행동하는 인간의 구현(representation of man in action)' 이라고 정의했다. 이 짧은 정의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행동을 드라마의 본질적인 요소로서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굳이 인간의 행동이라고 못박은 것은 인간 이외의 자연계의 행동은 그 행동이 의인화(personification) 되어서 나타나지 않는 한 드라마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뜻한다.
드라마의 본질적인 요소를 인간의 행동이라고 하는 것은 곧 드라마가 성립할 수 있는 최소의 기반이 인간의 행동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현대에서 한 편의 연극을 만들기 위해서는 각기 다른 방면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다. 드라마를 종합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드라마가 협동(co-operative) 예술임을 뜻하는 것이기도 한데 한 편의 연극이 만들어 지기 위해서는 극작가를 위시하여 연출가, 배우, 그리고 장치, 조명, 의상, 분장, 대. 소도구 및 음향 디자이너들과 작곡가, 안무가 등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 없어서는 안될 분야의 사람은 등장 인물의 연기를 맡은 배우 뿐이다.
우리는 극작가가 없는 연극을 이탈리아의 코메디어 델아르테(Commedia dell' Arte)나 우리 나라의 가면극 같은 즉흥극(improvisation)에서 손쉬운 예를 찾을 수 있으며 배우들끼리 모여서 만드는 집단 창작의 형태도 낯설지 않다. 어쩌면 현대 연극에서 제왕의 지위를 누리는 듯 싶은 연출가의 존재는 실상 그 분야가 명실상부하게 독립된 지 채 100 년도 될까 말까 하다. 인류는 2,000 년이 넘도록 연출가 없이도 훌륭하게 연극을 해 온 것이다. 그밖에 여러 방면의 디자이너들로 말하자면 무대장치 없는 '빈 무대(bare stage)', 인공 조명이 없는 야외 노천극장, 평상복 차림의 율동 같은 분야는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들 분야가 별로 중요치 않은 분야라는 뜻은 결코 아니고, 다만 이들 분야가 연극의 본질적인 요소를 이루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자 할 뿐이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연극이 연극으로서 성립할 수 있는 최소한의 요건은 곧 배우라는 점이다. 물론 배우가 관객 앞에 나서는 것만으로 연극이 성립하지는 않는다. 그가 관객 앞에서 어떤 의미 있는 행동을 시작할 때 비로서 연극은 이루어 지는 것이다. 곧 인간의 행동이 드라마의 본질인 것이다.
이제 행동(action)의 의미를 살펴볼 차례이다. 먼저 인간의 행동이라고 했을 때 이 행동은 인체적 움직임 뿐 아니라 말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행동까지를 다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행동을 뜻한다. 또 인간의 행동에는 적어도 다섯가지의 단계가 있다. 가장 저차원의 인간 행동의 단계부터 살펴보자면 먼저 '신체적 행동(physical action)'을 들 수 있다. 신체 각 부위의 움직임에서부터 신체의 이동에 이르기까지 눈에 보이는 모든 움직임이 여기에 속하며 먹고 자고 하는 등의 본능적 행동(instinctive action)들과 소화, 배설 등의 생리적 행동(physiological action)까지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 단계의 행동은 인간 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가장 기초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단계의 행동에 있어서는 인간 보다 동물이 더 우월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 다음 단계의 인간의 행동이 '사회적 행동(social action)'이다. 현대의 문명 사회 속에서 사람이 하루의 일과 중에서 가장 많이 하는 행동이 사회적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이 동시에 수없이 많은 사회적 역할(social role)을 골고루 수행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자면 집안에서는 부모나 자식의 역할을 하고, 집을 나서는 순간 한 사람의 시민이 되고, 동네 사람을 만나면 곧 다정한 이웃이 되고, 차도를 무단 횡단하는 순간에는 범법자로 바뀌며, 교통사고를 당하면 피해자가 되고,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으로 가면 환자가 되고, 조사를 받기 위해 경찰서로 가면 이번에는 피의자가 되고, 다시 풀려나서 직장에 출근하면 회사원이 된다. 잠깐 사이에 이렇게 많은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정상적인 사회인이라면 결코 당황하거나 맡은 역할을 혼동하는 법이 없다. 그런 뜻에서 사람은 누구나 출중한 배우의 소질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같이 사회적 행동이란 사람들이 만들어 낸 인위적인 질서 속에서 그 사회의 규율에 따라 움직이는 행동을 말한다. 학교, 병원, 시장, 법원, 은행, 국회, 극장 이 모든 것들은 사회제도(social institution)들이며 이 안에서 이루어 지는 관습과 규율과 약속에 의한 모든 행동들은 곧 사회적 행동인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인간이 동물에 비하여 우월하지만 이 사회적 행동은 역시 동물의 세계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 다음 단계인 인간의 행동은 희노애락의 모든 감정을 표현하는 '심리적 행동(phychological action)'이다. 특히 현대인의 심리는 복잡 미묘해서 얼른 포착이 되지 않기 때문에 현대인의 심리를 묘사해 내는 데는 남 다른 통찰력과 감수성이 요청된다. 흔히 소설이나 희곡 작가의 역량을 이 같은 섬세한 심리 묘사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심리적 행동은 단순하나마 동물의 세계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 다음 단계의 행동은 '지적 행동(intellectual action)' 이다. 지적 행동이란 과거의 경험을 분석하여 미래를 예견하고 자연 현상을 지배하는 배후의 법칙을 규명하여 현실을 개조할 수 있는 사고능력에서 나오는데, 이 범주에는 인간의 상상적 행동(imaginative action)과 미학적 행동(aesthetic action)도 같이 포함 시킬 수 있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과 아름다움과 추함을 구별할 줄 아는 능력들은 사고능력과 함께 인간 생활에 있어서 교육, 학문, 예술 등의 분야를 통해 문화의 발달과 함께 고도로 실현되어 가고 있다고 보인다. 이 같은 행동들은 인간 생활의 질적 수준의 향상을 가져다 주는 행동들인데 이 같은 행동들이 원시적인 수준에서나마 동물들의 세계에서도 전혀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 행동의 마지막 단계인 '윤리적 행동(moral action)'은 오직 인간에게서만 찾아 질 수 있는 최상의 인간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윤리적 행동은 어떤 일의 옳고 그름, 곧 가치를 구별하는 행동으로서 삶의 궁극적인 목적의식에서부터 연유되는 행동을 말한다. 윤리적 행동은 인간의 우연적인 삶을 필연의 것으로 만들고 순간의 삶을 영원에 이르게 하는 가장 고귀하고 고원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혼돈된 삶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는 윤리적 행동은 인간 생활에 있어서 종교와 신앙을 통해서 가장 두드러지게 실현되어 왔다.
우리는 지금까지 인간 행동의 다섯 가지 단계를 살펴보았는데 이들 행동의 단계에는 위계(hierarchy)가 있어 보인다. 예를 들자면 선량한 행인이 강도에게 폭행을 당하는 광경을 어느 사람이 목격했다고 하자. 그 광경을 본 사람은 윤리적 기준을 가지고 지적 사고에 의하여 그 행위를 옳지 못한 일이라고 판단하게 되며 분노의 감정을 일으키게 된다. 그는 경찰서라는 사회 제도를 통해 그 잘못을 시정하기 위하여 전화라는 사회적 수단을 이용하려고 걸어가서 손가락으로 번호를 누르고 음성을 사용하여 범죄를 신고하게 된다. 이 예에서 우리는 인간의 행동의 최상의 단계인 윤리적 행동에서부터 명령이 전달되어 최하위의 단계인 신체적 행동에 까지 이르게 됨을 보았다. 모든 인간의 행동이 이 같이 질서 있게 위계를 따라 일어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위에 든 예에서 만일 최상의 단계인 윤리적 행동이 인간에게 비어 있다면 그 이하의 행동들은 전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물론 인간에게 윤리적 행동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먹고, 자고, 학교에 가고, 극장에 가고, 사랑에 빠지고, 때로 실망하고, 분노하고, 사색에 젖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윤리적 행동이 비어 있을 때 과연 이 같은 잡다한 행동들에 어떤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뒤에 논의할 현대 연극의 문제와 관련된 것인 만큼 이 자리에서는 다만 인간의 행동의 단계들 사이에는 막연하나마 위계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을 지적해 두기로 하자.
또 하나 위에 설명한 인간 행동의 여러 단계와 관련하여 지적해 둘 것은 이들 여러 단계의 행동들이 독립적으로 일어난다기 보다 때로 복합적으로 때로는 동시에 발생한다는 점이다. 가령 책을 읽는 행동은 동시에 지적이고 사회적이고 신체적인 행동이며, 화가 나서 책상을 치는 행위는 동시에 심리적이고 신체적이며 윤리적일 수도 있다. 따라서 위에서 인간 행동의 단계를 다섯가지로 분류한 것은 단지 이해를 돕기 위하여 관념적으로 나눈 것이지 그 것들이 실제에 있어서 독립적으로 나타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데 위에 설명한 인간 행동의 단계에 있어서의 위계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 것은 드라마의 미학적 효과 또는 감동의 크기와 비례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아래로 내려 갈수록 효과는 떨어지고 위로 올라 갈수록 상승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다음 장에서 논의하게 될 비극은 가장 고원한 극형식이고 소극은 가장 저급한 극 형식이라고 흔히들 말하는데 - 실상 장르 사이에 등급이 나누어 질 수는  없는 일이지만 - 그 이유는 비극은 주로 인간의 윤리적 행동을 다루고 소극은 주로 인간의 신체적 행동을 다루기 때문이다. 가령 한 사람이 자신의 신체적 능력을 보이기 위하여 팔을 쳐든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만 그가 얼마나 힘있게 또는 똑바로 혹은 유연하게 팔을 쳐들었는가 하는 동작의 양태에만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팔을 쳐들어서 친구에게 인사를 했거나 아니면 진행하는 자동차를 멈추게 했다면 우리는 그의 신체적인 동작에 덧붙여 그에 수반된 사회적 의미까지 거두어 들이게 되므로 그 효과는 아까 보다 커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그의 동작의 양태가 아까와 똑같았다는 전제가 필요할 것이다. 이 것은 단순한 신체적 행동 보다는 사회적 행동이 연극적 효과를 높여 준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양자의 효과의 차이를 아직 실감하지 못한다면 계속해서 더 높은 단계로 예를 들어 보자. 이번에도 역시 똑같은 양태로 팔을 쳐들었는데 그 것이 환희나 분노의 감정을 나타내기 위한 심리적인 행동이었다면 친구에게 인사를 하거나 자동차를 멈추게 하는 아까의 동작 보다는 그 효과가 상승함을 느낄 수 있을 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번에는 역시 똑같은 동작으로 팔을 쳐들었으나 그 것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설명하기 위해서 혹은 아름다움을 나타내기 위한 예술적 동기에서라고 한다면 그 효과는 한층 상승될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인간의 행동의 단계를 살펴 보자. 개인적 이득을 위하여 조국을 배신한 사람이 적군의 안내자가 되어 아군을 습격하는 부대의 앞장을 섰으나 아군 진지 가까이에 와서 양심의 가책을 느낀 나머지 갑자기 팔을 높이 들어 아군에게 적군의 내습을 알렸다고 하자. 똑같이 팔을 높이 쳐든 그의 행동은 보기에 따라서는 사뭇 감동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위 예는 어느 면에서 공정치 못한 점이 있을지 모르나 왜 뛰어난 스포츠 경기가 한 편의 범상한 드라마만큼 효과를 안겨주지 못한 경우가 많으며, 왜 완벽한 무용 공연이 훌륭한 한 편의 비극 작품만큼의 감동을 안겨주지 못하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위의 얘기에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때로 스포츠나 무용이 커다란 감동을 안겨 줄 때에는 가만히 들여다보면 배후에 단순히 신체적 행동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을 때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한국선수가 참가하여 금메달을 따낸 감격적인 올림픽 경기의 배후에는 애국심이 깔려 있고 감동적인 무용 공연에는 드라마가 숨어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이 같은 얘기는 결코 스포츠나 무용을 과소 평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행동의 각 단계들이 우리에게 주는 미학적 효과에는 차이가 있음을 말하려는 것이고 그 효과는 인간 행동의 위계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커진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어느 희곡이 상위의 인간 행동을 다루었기 때문에 보다 큰 미학적인 효과를 거두었다고 표현하기 보다는, 같은 말이지만 말을 바꾸어 보다 큰 미학적 효과를 겨냥하여 상위의 인간 행동을 그렸다고 표현해야 할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때로 훌륭한 희곡을 칭찬할 때 '이 작품은 단순히 한 편의 연극이 아니라 철학이다.' 라는 말을 듣는 경우가 있다. 이 말은 자칫 그 작품을 쓴 극작가가 연극을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철학적 깊이를 노렸기 때문에 훌륭한 작품이 되었다는 말로 들릴 위험이 있다. 물론 그러한 칭찬에 작가 자신이 동의할 수 있고 그 작가가 애당초 그러한 의도를 가지고 작품을 썼을 수도 있다. 위에서 예로 든 버나드 쇼 같은 극작가는 희곡을 순전히 교화의 수단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작가의 동기야 어쨌든 그의 작품이 일단 작가의 손을 떠나면 그 작품은 독립된 생명을 가지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쇼는 사망했지만 그의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훌륭한 극문학으로 남아 있다. 그의 작품이 오늘날까지도 사랑을 받는 이유는 작가의 의도 때문이 아니라 그 것들이 훌륭한 예술 작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술이라는 것에 대하여 한 가지 중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 곧 예술은 감성적 행위이므로 지성적 행위와는 무관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드라마가 인간의 지적 행동을 깊이있게 그려내면 그 것은 이미 드라마가 아니라 철학이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어느 드라마가 인간의 심리를 깊이있게 그려냈다면 그 드라마는 드라마가 아니라 심리학이라고 말하고, 또 어느 드라마가 신체적 행동을 다채롭게 그려냈다면 그 드라마는 체육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따지자면 드라마 고유의 영역은 남아 날 수 없을 것이다. 위에서 말한 대로 드라마는 인간의 행동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다룰 수가 있으며 또 어떤 인간의 행동을 그리더라도 그 것은 모두 미적 쾌감(aesthetic pleasure)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다. 물론 드라마가 인간의 행동을 매우 깊이있게 그려냈을 경우에 미적 쾌감과 함께 부차적으로 관객에게 일깨움을 가져다 줄 수도 았으나 이 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이지 그 것이 전면에 강조 된다면 그 것은 이미 드라마가 아니거나 드라마라 하더라도 크게 손상된 드라마일 것이다. 이 점을 보다 부연해서 설명하기 위하여 우리는 <연극의 생명(The Life of the Drama)>에서 에릭 벤틀리(Eric Bentley)가 편 주장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는 현대에 와서 인간의 사고와 감정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태도가 일어나면서 예술에 대한 커다란 오해가 발생했는데 그 것은 예술이란 지식이나 사고와는 무관한 순수한 감정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곧 예술은 감정적인 것이고 학문은 지적인 것이기 때문에 둘은 결코 양립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벤틀리에 의하면 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오히려 감정이 배제된 딱딱한 수업 시간에서는 그다지 배우는 것이 없으며 많은 학습이 이루어 질 때에는 실상 상당한 감정이 수반된 경우임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실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감정이 극도로 배제된 것처럼 보이는 과학연구에서 조차 감정의 개입은 필요하다는 것이다. 과학적 탐구의 동기인 호기심 자체가 이미 감정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냉혹한 사실'을 탐구하는 일 자체가 '뜨거운 쾌감' 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딱딱해 보이는 과학에 흥미가 없기 때문에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연구 속에서 쾌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카사노바가 아이작 뉴톤 보다 더 인생을 즐겼다고 생각하는 것은 범인들의 착각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과학자들이 감정이 없다고 믿는 생각은 거꾸로 예술가들이 사고를 결여한 것으로 단정 짓게 만들어 준다고 말하면서, 벤틀리는 흔히 '강렬한 감정의 자연스런 분출(spontaneous overflow of powerful feeling)'이라고 한 영국의 낭만 시인 워즈워스(Willim Wordsworth)의 시에 대한 정의를 인용하면서 워즈워스의 위대한 정신(곧 이성)을 간과하는 것은 중대한 오류라고 말하고 있다. 훼드라(Phaedra)가 희곡 속에서 이성을 잃었다고 해서 그 희곡을 쓴 작가인 라신(Racine) 마저 이성을 상실한 것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벤틀리는 결론적으로 "사고는 예술에 있어서 감정의 세계를 위축 시켜 준다기 보다 오히려 강화시켜 주는 데 기여한다(Instead of constricting the life of the feelings, thought, in art, can serve to intensify it)'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드라마가 인간의 지적인 행동을 그리는 것이 드라마(곧 예술)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드라마 속에 그려진 지적인 행동이란 드라마와 무관한 지적인 메시지를 전달키 위한 것이 아니라 미적 쾌감을 불러일으켜 주기 위한 것이다. 이 점을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예가 곧 추리극이나 탐정극의 경우이다. 관객은 추리극을 보는 동안에 이성적 사고를 촉발하며 바로 거기서 재미를 만끽하는 것이다. 벤틀리가 사고는 감정을 강화시켜 준다고 말한 의미가 바로 그 것이다. 그러나 이 점은 비단 추리극에만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가령 어느 작품이 심오한 사상을 깊이있게 제시했다고 했을 때 그 작품의 재미는(혹은 감동은) 바로 그 사상의 깊이 때문에 증폭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느 작품이 '사상적 깊이는 있으나 재미가 없다.' 는 평을 듣는다면 그 작품은 드라마로서 실패한 경우일뿐더러 그 사상의 깊이 속에 과연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진실성이 담겨 있는 지도 충분히 의심해 볼만하다.
이제까지 드라마의 본질은 인간의 행동이며 인간의 행동엔, 여러 단계가 있음을 설명했는데 이제 '좋은' 드라마가 되기 위해서는 드라마에 그려지는 인간의 행동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살펴 볼 순서이다.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먼저 우리는 왜 희곡을 읽고 연극을 보러 가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물론 이 질문의 답은 너무 자명하다. 왜냐하면 드라마의 본질적 요소가 인간의 행동이므로 사람들은 당연히 인간의 행동을 보기 위해 드라마를 읽거나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 질문은 사람들은 드라마 속의 '어떤 행동'을 보기를 원하는가 하는 것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질문의 답 역시 너무 쉬워 보인다. 왜냐하면 누구나 '재미있는' 인간의 행동을 보기 위하여 드라마를 본다고 대답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질문은 최종적으로 "어떤 인간의 행동이 재미있느냐" 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쯤 되면 문제는 까다로워 진다. 왜냐하면 재미란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취미와 취향이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누구에게나 재미 있을 수 있는 인간의 행동을 꼬집어 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에게 재미를 느끼게 하는 인간의 행동들 가운데 공통된 성질을 찾아내기란 어려운 일 같지는 않다. 한마디로 말해서 사람들은 '신기한' 행동을 보고 재미를 느낀다고 할 수 있다. 일상생활을 통해서 매일 보고 듣는 친숙한 일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권태를 느낀다. 그러나 새로운 일, 낯선 일, 이상한 일에 대해서는 누구나 일단 흥미를 느낀다. 곧 이상함(strangeness)의 제공이 드라마의 비결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극작가는 누구나 남이 하지 않은 얘기, 기발한 착상, 독특한 인물, 참신한 언어를 개발하기 위하여 애쓰는 사람이다. 이러한 노력은 기성 작가 보다는 신인 작가들에게서 더 치열하게 드러나 보인다. 자기를 나타내 보이기 위하여 이제까지 보지 못하던 새로운 작품을 써내야겠다는 강박관념이 신인들에게 두드러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골머리를 싸매고 새로운 것을 찾으려 한다.
그렇다면 신기하고 이상한 인간 행동을 찾아내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그러나 실상 그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한 쪽 다리만 들고 서있어도 지나는 모든 행인들의 주의를 끌 수 있다. 신기한 일을 만들어 보이는 일이 어려울 것은 없다. 그런 일은 지능이 모자라는 사람일수록 더 잘 해낼 수 있는 일이다. 가령 모든 사람이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만원 버스 속에서 갑자기 어느 외국인이 터키말로 떠들기 시작했다고 하자. 모든 사람들이 하던 말을 멈추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왜냐하면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이상한' 말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상한 말로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주위의 흥미 어린 시선이 과연 얼마만큼 지탱될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2 ~ 3 분 정도 지나면 모든 사람들은 곧 흥미를 잃고 각자 하던 얘기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우리가 드라마를 보는 것은 이상한 행동을 보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 행동은 줄곧 이상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 행동은 최초의 호기심이 사라진 뒤에는 친숙(famiiliarity)하다는 느낌을 동시에 줄 수 있어야 한다. 하나의 행동이 이상하면서 동시에 친숙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 모순이다. 그러나 예술은 과학이 아니라 바로 모순 속에서 태어난다. 앞에서도 관객이 연극을 볼 때 정감을 느끼면서 동시에 미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 것 역시 상반된 두 개의 태도를 동시에 지녀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 같이 예술은 모순의 조화의 산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 창작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손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드라마의 행동이 줄곧 이상하기만 하거나 내내 친숙하기만 해도 좋다면 드라마를 쓰는 일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좋은 드라마는 낯선 것을 친숙하게 보여 주거나 친숙한 것을 낯설 게 보여 주어야 한다. 앞에서 예술은 구체성을 통해서 보편성을 추구한다고 말했는데 그 것이 바로 지금 하는 얘기와 상통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앞에서 예술은 모르는 것을 가르쳐 주는 매체가 아니라 이미 아는 것을 새롭게 깨우쳐 주는 매체이면서 연극은 그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매체라고 말했는데 그 역시 지금 하는 얘기와 맥이 닿는 것이다.
드라마는 이상하면서 동시에 친숙한 인간의 행동을 그려 보여 주는 것이라고 했을 때 친숙함에 대한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어떤 행동이 친숙하다고 느낄 때 무엇이 그러한 느낌을 주는가? 친숙한 행동은 먼저 '식별 가능(recognizible)'해야 한다. 어느 행동을 보고 그 행동이 무엇하는 행동인 지를 즉각 알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위에서 만일 만원 버스 속의 터키 사람의 예를 들었지만 그의 말소리가 신기할 망정 친숙하게 들리지 않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터키어를 식별할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버스 안에 우리 나라 지방 토박이 사투리로 떠들어댔다면 우리는 낯섬과 친숙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어서 계속 흥미있게 그의 얘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식별 가능하다는 것만으로 그의 행동을 친숙하게 느낄 수는 없다. 거기에는 또 하나의 조건이 필요하다. 가령 그 사람이 억센 사투리로 떠들어 대기를 "내가 오늘 두 팔로 걸어가다가 호랑이를 먹었는데 머리가 아파서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그만 울어 버렸다" 라고 말했다면 우리는 분명 그의 말을 식별할 수는 있으나 납득할 수는 없으므로 친숙하기는커녕 기이하게 들릴 것이다. 곧 어느 행동이 친숙하게 느껴지기 위해서는 식별 가능할 뿐 아니라 '납득 가능(convincing)'해야 한다. 위에서 설명한 인간 행동의 모든 단계가 납득 가능할 때 우리는 식별 가능한 행동들을 친숙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두 팔로가 아니라 두 다리로 걸을 때 그 행동은 신체적으로 납득이 가능하며, 선생님을 길에서 만났을 때 허리를 앞으로 굽히는 것이 우리에게는 사회적으로 납득이 가능한 행동이지 손으로 코를 쥔다면 이는 아프리카 어느 지방에서나 통용되는 인사법일 것이다. 또 재미있는 농담을 듣고 웃는 대신에 눈물을 흘린다면 역시 심리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행동인 것이며 1+1에 대한 해답이 2라고 했을 때 지적으로 납득 가능한 행동이 된다. 마찬가지로 살인강도를 보고 냉담한 태도를 취한다면 그 것은 윤리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행동일 것이다. 물론 인간의 행동을 납득할 수 있게 그리는 일이 위에 든 예들처럼 단순하고 손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특히 복잡 미묘한 현대인의 행동들을 납득할 수 있게 그리기 위해서는 인간에 대한 심원한 통찰력을 지닌 극작가의 존재를 필요로 함은 말할 필요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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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njung Theatre Company